2006. 8. 23. 01:11

시간이 가만히 서 있는 곳이 있다. 빗방울은 꼼짝도 하지 않고 공중에 멈춰 있다. 시계추는 반쯤

흔들리다 말고 둥둥 떠 있다. 개들은 코를 쳐들고 소리 없이 짖는 자세다. 행인들은 다리를 실로

매달기라도 한 듯 허공에 든 채 먼지 낀 거리에 얼어붙어 있다. 대추야자와 망고와 미나리 향이

공기 중에 멈춰있다.


바깥에서 방문객이 이 곳으로 들어오면 어느 쪽에서 다가오든 차차 느리게 움직이게 된다. 맥박이

점점 느려지고, 숨도 느슨하게 쉬게되고, 체온이 떨어지며, 생각도 흐릿해지다가 한가운데 다다르면

멈추게 된다. 이 곳이 시간의 중심지이기 때문이다. 이 곳으로부터 시간은 바깥으로 동심원을

그리면서 나아간다. 한가운데에서는 멈춰있고 중심으로 부터 멀어질수록 차차 속도가 빨라진다.

시간의 중심지로 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아이가 있는 부모들과 연인들이다.

그래서 시간이 서 있는 곳에 가면 부모가 아이를 끌어 안은 채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광경을 보게된다. 푸른 눈에 금발이 아름다운 어린 딸은 얼굴에 띤 그 미소를 거둘 줄 모르고, 발그레한

볼 빛은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주름살이 생기거나 기운이 빠지지 않을 것이고, 다치는 일도

절대로 없을 것이며, 부모가 가르쳐 준 것들을 잊어버리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고, 부모가 모르는

생각을 하는 법이 없을 것이며, 악을 전혀 모를 것이고, 부모에게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절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바다가 보이는 그 방을 절대로 나서지 않을 것이고, 부모에게서 손을 떼는 일이

절대로 없이 지금 그대로 있을 것이다.

또 시간이 가만히 서 있는 곳에 가면 건물 그늘에서 연인들이 끌어안은 채 입맞춤을 하면서 절대로

놓아주지 않고 가만히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사랑하는 남자는 지금 팔을 걸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팔을 절대로 떼지 않을 것이고, 추억이 담긴 팔찌를 절대로 되돌려주지 않을 것이며, 연인을 두고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위험에 빠지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며,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하는 일이 절대로 없을 것이고, 질투하는 법이 없을 것이며, 다른 사람과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고,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 지니고 있는 정열을 절대로 잃지 않을 것이다.

...중략...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은 사람들은 움직이기는 하지만 빙하가 움직이는 듯한 속도이다. 머리를

빗는 일에 일 년이 걸리 수도 있고, 입맞춤 한 차례에 천 년이 걸릴 수도 있다. 얼굴에 지은 미소가

엷어져 가는 사이에 바깥 세계에서는 계절이 여러번 바뀐다. 아이를 얼싸안는 사이에 여기저기에

다리가 새로 건설된다. 작별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도시가 무너져 내리고 기억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바깥 세계로 돌아간 사람들은 ......, 아이들은 금방 자라나서 부모가 수 세기에 걸쳐 안아주었던

일도 그저 몇 초간의 일로 잊어버린다.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자기 집을 마련하고,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고통을 겪으며 늙어간다. 아이들은 부모가

자기를 품안에 영영 끼고 있으려 했다는 이유로 부모를 저주하고, 자기 자신의 피부에 주름이 잡히고

목소리가 쉬어간다는 이유로 시간을 저주한다. 이제 늙어버린 아이들 역시 시간을 멈추고 싶어하지만

멈추고 싶은 순간은 부모들과 다르다. 아이들은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시간의 한가운데에 묶어 두고

싶은 것이다.

바깥으로 돌아간 연인들은 친구들이 가버린 지 오래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쨌거나 평생이 수도 없이 흘렀으니까.

이들은 알지 못하는 세계에서 움직인다. 바깥으로 돌아간 연인들은 여전히 건물 그늘에서 서로를 끌어안지만,

이제는 끌어안아도 어딘지 공허하고 외로워 보인다. 이윽고 이들은여러 세기에 걸쳐 했던 약속도 그저 몇 초 간의

일로 잊어버린다. 이들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도 질투를 느끼고, 서로에게 상처주는 말을 하며, 열정을잃고,

서로 서먹해지고, 이들이 알지 못하는세계 속에서 홀로 늙어간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의 한가운데에는 가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슬픔이 담긴 그릇이지만

삶을 사는 것은 숭고한 일이고, 그리고 시간이 없으면 삶도 없는 것이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이들은 만족한 기분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다. 설령 그 영원이 표본 상자 속에 박힌 나비처럼 꼼짝도 하지

않는 것이라해도.

- 책 '아인슈타인의 꿈'중'1905년 5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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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