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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2.11.23 한편의 시를 위한 길 2
2012. 11. 23. 14:53

 

  설악산 화채능선의 끝자락은 권금성이 있는 집선봉과 토왕폭을 품은 노적봉 능선의 갈래로 나뉜다. 설악산 입구에 위치한 이곳에는 대표적 명소로 비룡폭포와 토왕성폭포가 있다. 화려하게 각광받는 설악의 다른 곳에 비해 외진 이곳은 일반인들을 위해 달랑 비룡폭포만 열려있다. 그 외의 다른 곳은 암벽장비를 갖춰서 올라야 하는 릿지길이다.

 

   소토왕골 입구에서 노적봉을 오르는 릿지의 이름은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이다. 시를 헌정하고 싶을만큼 멋진 이름을 가진 이 릿지는 1989년 경원대산악부가 개척하였다. 노적봉과 토왕폭 주변에는 이 릿지 말고도 별을 따는 소년’, ‘솜다리의 추억’, ‘4인의 우정등이 있다고 한다.

   단풍이 흐드러지게 산 밑으로 쏟아져 내려오는 10월 중순 마침내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을 가게 되었다. 오래전 천화대의 기억을 더듬으며, 장비를 갖추어 산행하는 기분은 들뜸과 두려움이 복합된 감정이다. 내 일천한 경험으로 인해 암릉의 난이도로 이곳과 비교할 수 있는 곳은 천화대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왜 천화대(天花臺)는 천상의 꽃밭으로 불리고,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은 단지 이란 말인가. 노적봉릿지도 아니고 대()도 아닌 하나의 길인 이곳. 길이라 함은 무슨 의미일까? 생각건대 길은 길 위에 있음으로써 길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 멈춘 공간이 아니라 흐르는 공간이라는 말이다. 천화대가 이름으로도 대접받는 것에 비해 이 릿지길이 푸대접 받는 듯한 느낌은 무얼까.

 

   길 위의 행정은 모두 생략하고 이 릿지길에 대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장쾌한 맛은 공룡보다 못하고, 유려한 맛은 천화대보다 못하다. 오르는 길에 펼쳐진 풍광도 설악의 험악한 지능선 수준이다. 오르는 길에는 울산바위와 달마봉이 뒤쪽으로 보이지만, 케이블카가 지나다니는 권금성을 비스듬히 치켜 보며 오른다. 고도가 낮다보니 산행 길이도 엄청 짧다. 앞선 다른 등반팀 없이 주욱 달린다면 3~4시간이면 끝나는 릿지길이다. 까마득한 수직절벽을 양쪽에 끼고 있는 기세는 오히려 용아장성과 비슷하다. 그래선지 내내 용아의 이빨을 타고 오르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저평가될 수밖에 없는 이 릿지는 적어도 이 길의 끝자락인 노적봉에서 토왕성폭포를 만나기 전까진 그렇다.

 

   릿지라는게 원래 비경의 속살을 맛보기에는 최고가 아닌가. 어느 비경이든 직접 가서 그 속살을 직접 보는 것이 가장 근접한 경험이겠지만, 거리두기는 사물을 그자체로 즐기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1275봉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마등령을 오르는 길에서이다. 대승폭포가 가장 장대하게 보이는 곳은 폭포 앞을 지나는 작은 능선 길에서이다. 대승폭포를 그 밑에서 보다보면 대승의 느낌 대신 소승의 느낌이 들 것이다. 예전 아름답게 핀 절벽의 꽃 한송이를 자세히 담겠다고 애써 오른 그곳에서 과도한 아름다움의 기대에 비쳐진 그 초라함에 얼마나 실망했던가. 우리가 원하는 그곳은, 그곳 자체에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과 거리두기에 성공한 곳에서 제대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정상에 오른 사람도 오른 그 순간에는 자신이 올라있는 정상을 제대로 볼 수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토왕성폭포는 상단 130미터, 중단 110미터, 하단 80미터로, 합해서 320미터에 달하는 우리나라 최장 길이의 폭포다. 이 엄청난 장관의 폭포는 노적봉 맞은 편에 호쾌하게 솟구쳐있다. 공룡, 천화대, 용아 모두를 준다 해도 지금만큼은 맞바꾸고 싶지 않은 욕심이 생기는 곳이 바로 이 한편의 시를 위한 길 마지막에 존재한다. 이곳이야 말로 토왕성폭포를 가장 멋지게 거리두기해서 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울산바위와 달마봉>

 

 

                                                      < 3피치 >

 

                                            <피너클지대 : 나이프 릿지>

                                                           < 7피치 >

                                                                 <8피치 빌레이>

                                                                

                                                                 < 토왕성폭포>

                                                   < 하산길 릿지  >

 

 

   소토왕골을 거슬러 오르다 물길을 건너자마자 암벽장비를 착용하고 10여분 오르니 앞이 툭 터지며 숨어있던 주위의 산수가 드러난다.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푸른 녹음을 고스란히 담은 이 공간에 조로현상이 일어날 때 울긋불긋한 잎들의 옷갈이가 시작된다. 가을이 절정인 지금 이곳에서 자연의 흐름은 푸르름과 얼룩의 두 모습을 공존케하여 색의 균형을 맞추는 듯하다.

 

   노적봉을 향하는 이 한폭의 릿지는 좌우가 맞지 않는 수직의 성채같다. 수많은 바위쌓기를 거쳐 생긴 공간의 결절. 그 결절의 끝은 토왕의 치마폭이다. 성채의 좌우에는 조금 이른 단풍의 아우성이 연속된다. 어떤 단풍들은 옷갈이 조차 끝내고 서서히 옷을 벗고 있다. 바람이라도 불면 나뭇잎들은 멀리서 손짓하듯 우수수 떨어져 비상을 한다.

 

   토왕을 만나러 가기위해 릿지에 몸을 실을 때 그 옷들은 바람따라 날아올라 형형색색의 몸짓을 보여준다. 나이프 릿지의 허공 속에 발을 내딛다 수직의 밑을 내려다보니, 수백길 아래 소토왕골의 흰 물줄기와 울긋불긋한 단풍의 아우성, 그 위에 펼쳐진 환희의 적막을 보았다. 현기증 대신 이 공간의 비밀을 알아 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것도 잠시, 자신이 보는 것조차 잊게 하는 힘든 몸짓이 이 한폭의 릿지에 지난한 궤적으로 펼쳐진다. 멀리 세존봉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할 때 노적봉 정상에 선다. 벗들이 웃는다. 나도 웃는다. 돌아보니 울산바위와 달마봉도 석양 속에 금빛으로 웃는다. 앞에는 그야말로 툭트인 허공너머 토왕의 치마폭이 좌우 대칭의 균형이 맞게 걸려있다.

 

   우리가 정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마지막 빛의 향연이 한창이었다. 사진 몇장을 찍었지만 그리 맘에 들지 않았다. 이럴 때는 빛의 사라짐을 아쉬워하며 좀 더 이른 시간에 올라야 했다고 아쉬움을 토로하는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역광을 받은 토왕성폭포는 다른 행성같은 느낌이 든다. 이 저무는듯한 빛의 항연은 오히려 밝고 선명할 때보다 가슴에 더 남았다. 주변에 솟은 늦가을 능선에 잠긴 음영진 토왕폭의 자태는 신비스럽기만 해서 이 짧은 릿지길의 존재를 소중하게 만든다. 이 저물어가는 짧은 만남으로도 이럴진대, 이른 아침빛에 이슬 머금은 자태며, 한바탕 폭우라도 쏟아진 후의 찬란한 물줄기며, 한겨울 얼어붙은 거대한 수직의 기둥은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토왕은 매번 다른 모습으로 순간순간 찬란히 빛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위대한 공간을 노래한 한편의 시가 탄생했던 것이리라.

이 릿지길을 처음으로 개척한 뒤 김기섭은 다음과 같이 한편의 시를 지었다.

 

 

한 편의 시를 위한 길

 

 

암벽화 끈을 조이며

이마에 붉은 스카프를 맨다.

 

소토왕골

시퍼런 물소리가,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오르고 있는 이 길은

동해의 푸른바다가 생기고

바람이 생기고 우리가 처음인지 모른다 

 

설악산 오면

가슴에 진한 병만 얻어간다던

녀석의 얼굴이 생각났다 

 

텐트를 두들기는 빗소리도

소토왕골을 가르는

하켄의 경쾌한 바람소리도

가슴 언저리 앙금처럼 뚜렷이 박히고

박힌 자리마다 바람처럼 돋아나는 에델바이스 

 

우리는

인간의 언어를 다 동원해도

표현치 못할

한 편의 를 보았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처럼 가슴 깊숙히

우리가 구름 위에 서 있다는 것을

태어난 처음 깨달았다.

 

 

 

   김기섭의 시도 정말 멋지지만, 이 공간은 윤동주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와 그 서시(序詩)와도 어울리는 듯하다 토왕폭 주변에 개척된 릿지의 이름은 윤동주에게서 영감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선지 토왕의 별을 노래하는 마음잎새에 이는 바람’, ‘오늘 밤에도 바람에 별이 스치우는. 이 서시가 가장 잘 어울리는 장소가 바로 이 한편의 시를 위한 길’은 아닐까. 토왕성을 나타내는 한자를 토왕(土旺)의 성채(城砦)가 아니라 토왕(土旺)이라는 별[星]로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토왕별을 따는 소년이 지난 우정을 돌이켜보고 솜다리의 추억을 곱씹는 곳. 그래서 이곳에서 한편의 시가 탄생한 것이리라.

   각자가 따로 존재하지만 필요에 따라 한 줄로 묶여있는 묘한 장소. 내 삶의 끈질김이 자일을 통해 버텨내야하고 나홀로의 무력함이 역설되는 공간. 그 속에서 우리는 두려워도 하고, 경탄도 하며 미래를 다짐하기도 한다. 우정이란 그 살들을 연결시키는 자일처럼 질긴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자연과 사람을, 현실과 상상을 묶는 곳. 그리하여 풍광의 아름다움이 내면의 그것으로 자리매김할 때 한편의 시가 떠오르는 곳. 어디에나 있는 경험이지만 어디에도 없는 경험의 당위성을 깨닫게 되는 곳. 그렇게 보면 김기섭이 노래한 한편의 를 위한 길에서 자체는 토왕폭과 더불어 빛나는 이 찬란한 공간이 아닐까.

   너무나 숭고해서 한편의 시를 헌정하고 싶은 생각이 저절로 드는 이 찬란한 공간을 노래해본다.

 

 

 

 

土旺을 위한 노래

         - ‘한편의 시를 위한 길에 붙여

 

 

한폭의 릿지는 좌우가 맞지 않는 수직의 성채.

공간의 결절.

그 결절의 끝은 토왕의 치마폭.

치마는 좌우 대칭의 균형이 맞는 허공너머에 걸려있다.

 

한철 푸르른 녹음을 고스란히 담은 이 공간에 조로현상이 일어날 때

울긋불긋한 잎들의 옷갈이가 시작된다.

때 이른 단풍의 아우성 속에 허공으로 발을 내딛을 때는

천길 아래 계류와 울긋불긋한 카페트를 밟아야만 하리.

 

사방은 빠져 나갈 곳 없는 외길.

외길 위에서 나지막이 노래하리.

부르는 노래는 외통수의 노래.

노래의 시작과 끝을 닮은 길 위의 여정.

 

나이프 릿지를 가득 채운 정적 밑에는

거친 바위를 두부처럼 잘라내 재단한 한폭의 풍광.

명색이 피너클의 자태처럼 백척간두의 허공길을 열어주고

허공의 그림자는 먼발치에 퍼져 한 폭의 물줄기로 피어난다.

 

바위의 결이 날이 설수록 노래는 사라지고

풍경의 흔적이 낯설수록 노래는 고조된다.

칼날능선은 웃음기 한 점 없는 삭풍처럼 서늘하고

천길 밑 계류가 노래하는 바람 따라 웅얼거린다.

 

살은 사라지고 뼈만 남은 骨山의 뼈조각 위를 오르는 살들의 몸짓.

내면의 뼈가 살 밖의 뼈와 조우해서

얄팍한 자기 살의 안부를 묻고,

만지고 밟고 넘는 지난한 부딪힘 끝에 자신을 드러내는 이 곳.

 

급격한 단절이 풍경에 다리를 놓아

까마득한 허공에 걸린 폭포로 비약하는 길 없는 길.

이곳은 바람이 바람의 노래를 하고 토왕이 자신의 자태를 뽐내는 곳.

허공에 걸린 물줄기조차 자신의 자취를 무화하는 곳.

 

이곳에서야 터져 나오는 노래.

거친 숨결이 한편의 가락 되어 바람처럼 흩날리고,

깊은 슬픔이 바람으로 화해 사라지며,

오랜 침잠이 수직의 물줄기 따라 창천의 흰 구름으로 승화되는 곳.

 

부르고 싶은 노래는 바람의 노래.

입가를 맴도는 노래는 해방의 노래.

폭류처럼 노래하고 바람처럼 넘실댈지니

별을 노래하며 날아오를지니.

 

낮보다는 밤이 잘 어울리는,

먼지같은 유한한 존재의 흔적이

환희의 적막 속에

미미하게 별빛으로 남는 곳.

 

계류의 긴 실과 작은 실이

성채 너머를 엿보다

실타래로 얽혀 아스라한 빛에 젖다가

기어이 용트림하며 치솟는 빛무리.

 

빛에 젖다

스스로 빛이 되어버린

...

그대가 있어서 비로소 찬란한...

 

                             2012. 11. 23. 들불

 

 

 

 

* 함께 하며 기꺼이 이끌어준 산벗들께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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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