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로 돌아오자마자 병원 중환자실을 찾은 나는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다.
팔보다 얇아진 다리, 주렁주렁 달린 링거줄, 인공호흡기줄, 소변줄과 음식물 주입줄, 각종 센서들...
더 이상 사람의 모습이 아닌 아버지를 보며 가슴 깊이 통곡하였다.
병마와 힘들게 싸우시던 아버지께선 결국 2004년 6월 영면하셨다.
화려했던 나홀로 여행은 포카라에서 하루를 머물고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하룻밤을 더 보낸 후
아주 값비싼 편도 비행기를 타고 방콕을 거쳐 서울로 들어오는 것으로 끝이났다.
안나푸르나의 깊은 계곡인 마파에서 아버지 소식을 듣고 4박 5일만에 서울로 귀환한 초특급 탈출작전이었다.
산속 오지도, 네팔을 탈출할 비행기편이 없는 것도, 귀국을 가로 막는 여러 변수 어느 것도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그를 위해 주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혼신의 힘으로 도와주었다.
가이드 랄(Lal), 소풍의 고철사장님, 현지 여행사 직원들, 한국여행객등등...
특히 난 헌신적이며 현명한 이 네팔 친구를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포카라에서 랄과 마지막으로 포옹을 하면서,
잘 지내라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하였다.
2003년의 여행은 '끝나지 않은 여행'이 되었고, 결국 나 자신과 랄에게 약속을 지켰다.
올해 초 드디어 미완의 여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숙제처럼 남아있던 ABC(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와 인도여행을
무사히 마치었다.
블로그에 여행기를 끄적거리게 된 계기는 당시 트레킹을 준비하며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여행지에 대한
정보는 있으나 사진을 별로 볼 수 없었던 답답함이 시발이었다.즉, visual에 대한 부족함을 좀 해소하고자
사진 중심으로 글을 올리게 되었다는 변명을 하고 싶다.
가뜩이나 많은 정보의 홍수에 하나 더 추가하는 우를 범한 것 같기도 하다.
다만 트레킹에 대한 정보와 경험만 대략 건져지기를 바랄 뿐이다.
우승 소감을 묻는 기자에게 어느 독일 감독이 "어제 내린 눈"과 같다고 한 말은 무척 유명한 축구계의 명언이다.
우승의 짜릿한 감동이야 평생 간직하고 싶겠지만 또 다른 승부의 세계가 기다리는 만큼 그 감동은 과거로
넘겨버리고 오늘에 충실해야 한다는 냉철하며 현실적인 사고가 이 말의 깊은 뜻이다.
독일어로 ‘Schnee von gestern'이라는 이 말은 ‘이미 다 지나서 소용 없어져 버린 일’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
어제는 어제일 뿐 오늘은 오늘대로순간 순간의 현실을 실감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2년 전의 여행은 나에게 있어서도 '어제 내린 눈' 정도가 아니라, 돌이켜 볼 필요가 있을까라고 할 만큼 퀘퀘묵은
과거사다.
하지만 정리를 하다보니 당시 나를 여행의 세계로 밀어넣은 '여러 정황'과 나를 이끌었던 '삶의 주제'를 한번
더 되돌아보게 하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국내에서도 나홀로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긴 여행을 통해 바라던 욕심은 아주 많았다.
가끔 format 되고 upgrade 되어지는 내 PC 처럼,
내 의식도 성숙해지길 바랬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한 용서도 바랬고,
가슴 속 깊이 자리잡았던 깊은 상처가 치유되길 바랬으며,
나를 감싸는 집착과 욕망에서 자유로와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 소박하고 미숙한 여행이 남긴 결과는아직도 현재 진행형으로 조금씩 익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만든 좌표위에서 항상 자기나 혹은 타인이 어디쯤 와 있는지 궁금해하며 결국
그 위치를 행복과 불행의 판단근거로 삼는다.
여행이 주는 최고의 선물은 자신 만의 바로 그 좌표를 돌아보고 뒤흔드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돌아봄을 통해 자신을 upgrade 하게 될 것이며, 결국 자기가 세상을 보는 방식 또한 upgrade될 것이라고 믿으며...
마지막으로 히말라야 자락에서 느낀 수많은 아름다움, 정겨움, 복됨, 사람다움, 자연스러움등 이 모든
것들을 긴 시간동안 잘 읽어주신 분들과 여행을 앞두신 분들을 비롯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으로
회향(廻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