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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3.31 혼술, 내 공허한 추억에 대하여 1

 

인터넷에서 혼술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이 우리가 익히 알 만한 정의가 나온다.

혼자 마시는 술, 또는 그런 행위를 뜻한다.”

  최근 홀로 사는 이도 늘고 살림살이도 힘들어서인지 혼술하는 사람이 점점 증가한다고 하니, 머지않아 이 말이 정식 국어사전에도 실리지 않을까 싶다. 물론 혼자 술 먹는 일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예전부터 혼자 술 먹는 일을 일러 독작(獨酌)이라고 했고, 이백(李白)은 달 아래 홀로 술 마시는 쓸쓸한 정취를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멋진 시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은 생존을 위해 뭔가를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다. 우리는 술을 통해 타자와의 관계를 재설정한다. 다른 사람과 술을 같이 먹는 것을 대작(對酌)이라고 하는데, 대작을 혼술 식으로 표현하자면 떼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른바 떼술을 한다는 것은 술이라는 수단으로 함께 무언가를 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술의 힘을 빌려 우리는 섭섭함을 토로하거나 다투기도 하고, 그 결과 치유되거나 상처받기도 한다. 술이란 우리가 사람들 속에서 관계성을 보존하고, 개선하기 위한 일종의 수단이다. 그러나 때로 술은 실존성을 띠기도 한다. 우리는 결국 취하기 때문에 취기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경우도 많다. 떼술로 시작한 술자리는 혼술로 마무리 되거나, 떼술에 지친 사람들은 혼술을 도피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하이데거는 글쓰기 행위를 글이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술이 인간을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으로, 달리 말해 취기(醉氣)의 나타남이다. 혼술이야말로 나를 통해 술 스스로가 드러나게 하는 행위이다. 여타의 방해 없이 술만을 오롯이 마주해서, 나를 술로 채우는 행위이다. 놈은 앞에 놓여 천천히 내 손길을 기다린다. 놈은 입술에 진한 감촉을 남기고 입속으로 들어가 한 바퀴 돈 후 꿀꺽하는 순간 육체 깊은 곳으로 사라져 간 후 서서히 몸속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나와 놈 둘 중 하나가 지칠 때까지 반복된다. 이처럼 혼술을 통해 우리는 술을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경험해 볼 수도 있다. 좋게 말해 술을 통한 내면의 여행 혹은 위빠사나 수행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혼술을 마냥 예찬할 수만은 없다. 작년 겨울 인도에서 설산이 있는 네팔로 혼자 여행한 적이 있다.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곳 보드가야에서 열린 달라이라마 법회에 참석한 후,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까지 30시간 가까이 직행버스를 탔다. 군데군데 비포장 길은 험했고 안개는 밤새 자욱했다. 해가 떴어도 세상은 아주 뿌옜고 부처님께서 거닌 옛 마을들은 지저분했고 꾀죄죄했다. 길도 나무도 사람도 모두모두 비루했다. 허한 갈증에 심신이 말라왔다. 밤늦게 도착한 네팔의 게스트하우스에서 그 허함과 피곤함을 혼술로 달래고자 했다.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켜도 계속 허했고 외로웠다. 이때 네팔로 출장 온 인도 청년이 합석을 청하더니 기꺼이 자신의 술을 권한다. 술벗의 등장은 말벗의 등장이자 청승맞은 혼술의 청산이었다. 반가웠고 따뜻했다. 여행길에 느꼈던 그 공허함이란 결코 혼술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함께 나눌 때만 채워지는 연민 같은 것이었기 때문이리라.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인도 친구가 고맙다.

 

* 이 글은 "법의 향기" 2018년 10월호에도 실린 글입니다.

 

 

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