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발짝 앞에 거대한 장막이 있다.
여기는 누차 꿈꾸어 왔던 경계이자 계기이다. 짙게 드리운듯한 장막 저편은 나에겐 새로운 세계이다.
나는 이미 저 너머에 대해 많은 의미를 부여해왔다. 그러나 이 장막 뒤의 세계가 일상의 끝인지 또 다른 시작인지 명확치 않다.
지금 여기에서 일상의 시작과 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묘하게 연속되어 있다.
일상의 모호함으로 인해 내가 꿈속에 있는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하다.
오로지 참을 수 없는몸의 가려움만이 내가 꿈속에 있지 않음을 가늠케 하는 기준이다.
다시 한번 얼핏 본 거대한 세계는 저 장막 뒤편에 숨 죽여있다. 그리고 그 장막 뒤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끊임없는 정적과 움직임만이 가득 찬 세계일 것이다.
드디어 나는 장막을 열고 거대한 상념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나는 걷는다. 고로 존재한다.
지금 명확한 것은 다만 그것뿐이다. 이것은 내가 꿈속에 있지 않음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단서이다.
걸음의 세계야 말로 당분간 주변의 시공간 속에 유일한 의미로서 존재하게 될 나만의 세계이다.
그리고 이제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게 될 것이다. 시공이 하나일지 모르는 그 곳을 향해서,
시간이 정지되었을 시간의 중심부를 향해서, 태초의 시원을 향해서 걸어갈 것이다.
이 새로운 느낌을 위해 이곳은 존재한다. 끝없이 걷는 와중에 상념은 세계로부터 나를 분리시키겠지만,
걸음과 상념이 하나가 될 때 나는 비로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중심부로 향해감에
따라 상념의 속도도 점점 느려져 마침내 생각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짧고도 깊은 상념으로부터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한 것은 앞을 가로막은 수많은 양들이었다.
길은 굽이굽이 끝없이 이어져 있고 앞에는 산더미 같은 짐을 진 포터들이 앞서가고 있다.
이제 우리 뒤에는 조랑말과 양들이 쫓아오고 있다. 이곳에서 양들은 즐거워 보이지만 조랑말은 고단해 보인다.
그들의 존재 이유가 다르기 때문일거다.
조그만 다리를 지나면서 멀리 설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직 발토로 빙하를 대표하는 산군들은 보이지 않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서서히 주변을 에워싸는 산들이 높아지며 그 기세에 압도된다.
구름이 오락가락하며 봉우리를 보여주다 말다를 반복하더니 서서히 흐려진다. 산이 높아짐에 따라 주변은 사막과 같이 황량해지고 있다.
고로폰(Korophon, 3000m)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우리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점심 때는 매번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포터들은 밀가루 구운 빵인 난을 매 끼니마다 먹었다. 이들이 이렇게만 먹고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지가 염려된다.
길은 이제 브랄두강을 끼고 있는 산의 경사면을 깎으면서 나있다. 산비탈이 서있는 곳에서는 절벽을 파서 길을 냈다.
두모르도(Dumordo) 강이 우리 앞을 막고 있다. 두모르도 강은 판마(Panmah) 빙하에서 흘러나오는 강이다.
이 강이 발토로빙하에서 흘러나오는 비아호(Biaho)강과 합수하여 브랄두강이 되는 것이다.
바로 강 건너편이 줄라인데 강을 건널수가 없다. 여기서 다리가 있는 곳까지는 한참을 걸어올라가야 한다. 과거에는 강 양편을 쇠줄로 연결하여 바구니를 타고 건넜다고 한다. 현재는 강 상류의 강폭이 좁아지는 곳에 설치된 다리를 이용한다.
다리 건너 20분정도 걸어서 오늘의 목적지인 줄라캠프에 도착하였다.
트레킹 첫날이라 몹시 힘들다. 배낭은 10킬로밖에 안되는데도 몸을 짓누른다. 호흡은 흐트러지고 발은 무겁다.
경계 너머의 일상은 황량하고 원시적이다. 길 위에서 꾸물거리는 삶의 움직임 외에는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하다.
그러나 정지된 듯 보이는 이곳에서 삶과 죽음은 끊임없이 순환한다.
식물은 조금의 습기라도 있는 곳이면 자라난다. 길 한 곁에 누워있는 말의 사체는 앙상한 뼈가 되어 가고 어김없이 풀들은 이를 자양분으로 자라난다. 이곳에서 식물은 동물이 되고 동물은 식물이 된다.
이 끝없는 순환으로부터 어떠한 존재도 자유롭지않다.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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