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라캠프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속옷을 포함하여 몸에 걸친 모든 옷을 갈아입었다.

또한 입었던 옷과 침낭을 널어 햇볕에 말렸다. 가이드 익바르가 알려준 벌레 퇴치법으로 옷이나 침낭에 붙어 있을 벌레를 내쫓기 위한 것이다. 같은 텐트를 사용했음에도 공산님과 요사니는 벌레에 물리지 않았다고 한다. 원래 한국에서도 모기가 가장 좋아하는 선호대상이긴 하지만 왠지 억울한 느낌이 든다. 허리를 따라 퉁퉁 부어 오른 벌레물린 곳에 물파스를 바르면서 그 가려움에 몸서리를 친다.



트레킹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았지만 펼쳐질 앞 길이 밝지만은 않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2주전 삐끗했던 허리가 뻐근하면서 묵직하다. 스카르두까지 장시간 버스탑승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걸으면 좀 나아질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늘의 컨디션을 보아하니 앞으로가 걱정인 것이다.


이런 우려는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공산님은 어제부터 설사가 심하여 오늘만 대여섯번 했다고 한다. 말씀 중에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요사니도 나름 좋아 보이는 컨디션이 아니다. 게다가 요사니는 고소 경험이 처음이라 앞으로 닥쳐올 4000미터 이후에서 고산증이 올지 어떨지 불안해한다.


이렇듯 경계 너머의 일상은 단순해지는 대신 치러야 할 또 다른 형태의 댓가들이 있다. 불확실함에 대한 걱정과 불안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리 스스로 원한 것이기에 어떠한 불만이 있을리 없으며 여러 상황을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 게다가 바로 앞에 펼쳐진 거대한 자연이야 말로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에 몰입케 하는 강력한 흡인력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줄라캠프 바로 앞 강건너남쪽에는 거대한 봉우리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듯 우뚝 솟은이 직벽은 바코르 다스라고 한다. 이 봉우리를 시작으로 발토로지역의 하늘을 찌르는 듯한 연봉들이 나타나게 된다.



              < 바코르 다스(Bakhor Das, 5810m) >


아마도 뒤쪽 편에서 찍었을 바코르 다스의 사진은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


               < 바코르 다스(Bakhor Das) from www.summitpost.org>


앞으로 트레킹 코스는 정동쪽으로 향하므로 아침에 일찍 서두르지 않으면 해가 뜬 후 펼쳐질 더위를

피할 길이 없다. 따라서 무조건 4시반 기상 6시 출발이라고 익바르가 얘기한다. 어차피 밤에 할 일도

없는지라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

새벽 4시40분에 기상하여 출발준비를 한다. 날씨는 아주 맑고 앞의 바코르 다스는 햇빛 속에 우뚝 솟아있다.



                              < 아침햇살에 빛나는 바코르 다스>


비아호(Biaho)강을 따라서 길이 펼쳐져 있다. 이른 아침인데도 햇볕이 엄청나다.

햇볕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다. 너무 더워서 준비해 간 우산을 쓰고 간다.




좁은 협곡 옆으로는 풀 한포기 없는 잿빛의 산이 줄지어 서있다.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려서 하늘을 보니 헬기 2대가 협곡을 따라 상류로 진행한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브로드 피크에서 사고가 난 산악인을 수송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올라가는 포터 말고도 많은 포터들이 위에서 내려오고 있다. 내려오는 이들의 짐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말과 나귀 역시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말이 지는 짐은 포터의 3배이상 나귀는 2배이상을 진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포터보다 말이 선호된다. 그러나 짐을 지는 값은 사람이나 말이나 Kg으로 따지므로 동일하다.

짐을 지는 말이 발토로빙하를 거슬러 올라갔다 내려오면 말발굽의 편자를 갈아줘야 한다고 하니, 얼마나 험한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오고 가는지 그 노고에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의 짐 일부도 포터의 등판 대신 말의 등에서 매달려 오고 있는 것이 보인다.






강이 서서히 한 쪽으로 밀려나더니 너른 평원이 나타난다. 가뜩이나 더운데 물소리조차 안들리니 더 덥게 느껴진다.

멀리 돌집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점심시간이 된 것이다. 캄촉(Skam Tsok, 3300m)에 도착하였다. 캄촉은 마른 가시풀이란 뜻이다. 그늘이라곤 조금 튀어나온 바위 밑 뿐이고 거기도 이미 선점자가 있다.

물건을 파는 돌집으로 바로 들어가서 더위를 식혔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페트병에 든 콜라를 사서 마신 후 포터들에게도 돌렸다.




오늘의 목적지는 빠유(Paiju, 3450m)이다. 멀리 빠유의 뒷 봉우리인 빠유피크(6610m)가 보이기 시작한다. 눈으로 봐서는 얼마되지 않을 거리로 보이지만 여기서 빠유까지는 3시간 이상의 먼길이다.




강 옆의 위험한 급경사를 한참 걸어 올라간 후푸석한 먼지 길을 내려가니 저 멀리 푸른 빛이 보인다. 이 삭막한 곳에 어울리지 않는 푸른 숲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 푸르름의 경이로움은 발토로 빙하를 향하여 올라갈 때는 느끼지 못하지만, 발토로 빙하에서 내려올 때 생명의 신비로서 다가온다고 한다. 설산의 희고 검은 색과 빙하지대의 잿빛 속을 헤매다 다시 보는 푸른색이야 말로 진정 경이로움 그 자체일 것이다.




빠유는 마치 산도적들의 산채처럼 생겼다. 평평한 대지에 있는 캠프장이 아니라 산을 깎아서 계단식으로 만든 캠프사이트이다. 

놀라운 것은 이 곳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커다란 나무들이 있다는 것이다. 벌목을 금지하고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감으로 쓴다고 하니 이 희귀한 숲도 언젠가는 사라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빠유 이후부터는 발토로빙하로 진입하게되므로 마지막 매점과 화장실과 샤워실이 있다. 빠유는 고소적응 차 하루 쉬어가도록 권유하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있다. K2 시즌은 6월~8월이므로 지금이 피크인 것이다. 포터까지 합하여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진을 치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동물들(소, 염소, 닭등)이 여기까지 끌려와서 사람들의 주식으로 사라져가는 곳이기도 하다.



                                                        < 빠유에만 있는 울창한 숲 그리고 야영지 >


항상 마지막이란 말은 우리로 하여금 행동하게 한다. 앞으로 최소 열흘 이상은 씻지 못하게 되므로 여기가 마지막

샤워장(씻을 곳)이란말 에 홀딱 넘어가 한참을 기다려서 대충 물을 끼얹는 샤워를 하였다.


캠프장에서 룩셈부르크에서 온 교포 부부가 포함된 한국 트레킹 팀을 만나게 되었고, 어쩌다 보니 트레킹 내내

같은 길을 가게 되었다. 그 결과 공산님과 룩셈부르크에서 온 여인과의 지독한 애증의 인연이 시작된다. 이 지구의

오지 또한 이런 저런 인연을 통해 한국인라는 정체성을 또 다시 느끼게 해주는 작은 사회가 된다.


산속으로 피한다고, 무인도에 혼자 있다고 해서 우리를 이루는 그 어떤 정체성이 어디 가겠나마는...






멀리 울리 비아호(Uli Biaho, 6417m)와 트랑고 산군의 일부가 보인다. 발토로 빙하를 따라 난 외계 행성같이 생긴 곳으로 이제 내일이면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공산님은 앞으로 푸른 빛을 그리워하게 될 터이니 되도록 많이 즐기라고 하신다. 과연 우리는 어떤 존재가 사라져버리기 전에 그 소중함을 알 수 있을까. 


푸르름이 사라질 곳, 푸르름을 담보로 세상의 비밀스런 구석이 될 곳, 각자의 상념으로 화현하게 될 곳, 과연 그 곳은 각자가 꿈꿔 온 대로 있기나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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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