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적으로 한참을 앞질러 내다보기 위해서는 공간적으로 멀리 보는 것이 필요하다.
- 대니얼 데닛
산모퉁이 너머 홀연히 나타난 거대한 봉우리는 우리 가슴을 벅차게 한다.
특히 별다른 마음의 준비없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큰 산은 보는 순간 경외의 대상이 된다.
게다가 구름이라도 산 언저리에 걸쳐있으면 산은 더 크고 신비스럽게 보인다.
히말라야를 걷다보면 거대한 봉우리에 둘러싸인 자신을 발견한다. 앞에 펼쳐진 수직 고도차 3000m 이상의 연봉들은 경외감과 더불어 압도당하는 느낌을 준다. 이런 압도감은 굳이 히말라야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북한산에서 하루재 너머 인수산장 쪽으로 모퉁이를 돌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인수봉이 나타난다. 치켜서있는 거대한 돌기둥은 정말 도도하며 가슴 벅찬 환희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산의 거대함은 곧 익숙해진다. 자극에 둔감해지는 우리의 속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산에 파묻혀 있다 보면 주변의 봉우리들이 얼마나 높은지 낮은지 알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멀리보이는 산의 높이는 쉽게 가늠할 수가 없다.
멀리서 바라 본 에베레스트는 속초에서 바라보는 설악산보다 작다. 그렇다고 해서 설악산이 에베레스트보다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멀리 있는게 작아 보이는 원근법에 기인하는 것이다. 멀리 있는 산이 작게 보인다고 해서 그 크기가 실제로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쉽게 착각에 빠진다. 큼과 작음, 가까움과 멀리 있음에 대한 오해는 산을 바라보는 것에만 있지 않다. 삶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근법적 착각에 대한 일례로 피그미족이 있다.
정글에 사는 피그미족들을 평지에 데려다 놓고 멀리서 기차가 오는 것을 보여주면 대부분 기절한다고 한다. 나무가 빽빽한 정글에 사는 그들로서는 사물이 작게 나타나서 커지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즉, 사물을 향해 다가갈수록 커지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히 멀리 점처럼 보이던 기차가 다가올수록 점점 괴물처럼 커지는 괴이함을 감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보는 대로 사물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림에서 원근법의 등장은 사물을 제대로 묘사하기 위해 즉 실제로 보이는 대로 그리기 위해 만들어진 기법이다. 원근법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는 공간의 모습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림이나 사진에 사실처럼 표현되었다고 해도 그 순간 실재의 한 모습일 뿐, 실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우리가 보는 대로 사물은 존재하는가?
우리가 사물을 입체적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사진을 찍듯 이미지들의 집합으로 기억이 구성된다. 그래서 공간개념도 연속적으로 진행되는 영화같은 흐름이 아니라 스냅 사진처럼 불연속적이며 단편적 구성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래서 기억을 통해 재현된 모습들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이 아니라 우리의 잣대로 걸러낸 자신이 만든 기억인 경우가 많다.
멀리 떨어진 빌딩과 산을 바라보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산과 빌딩의 위치는 서로 다른 방향이지만 편의상 같은 방향으로 나타냈다.)
보는 사람에겐 빌딩의 높이와 산의 높이가 같아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 빌딩의 높이와 산의 높이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빌딩까지의 거리(L1)와 산까지의 거리(L1+L2)가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높이로 보이는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에 있기 때문에 산까지의 거리와 빌딩까지의 거리는 알 수 없다. 경험적으로 저 산이 빌딩보다 멀리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지만 얼마나 멀리 있는지에 대한 정보는 없다. 즉, 저산이 얼마나 높고,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다만 산까지의 거리가 멀기 때문에 산이 높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반대로 산을 빌딩과 같은 높이라고 생각하고 산이 별로 높지 않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이렇듯 동일한 산을 보고 높다고 하거나 높지 않다고 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산의 높이가 높다거나 낮다고 생각한 두 경우 모두 산의 높이는 이미 실재와는 관련이 없다. 자기 마음에 일어난 일종의 가치부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3층 높이의 건물 바로 밑에 가서 건물 꼭대기를 보면 하늘과 맞닿은 높이라고 느끼더라도 경험상 높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렇게 산의 높이에 압도되는 것은 자신의 마음 속 경외감에 불과하지만 자신은 그 실재성을 확신하는 경우가 많다.
문제는 우리가 산과 빌딩을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미래와 목표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정을 한다. 실제로 산을 오르기 위해서 걸어야 하는 거리는 L1 + L2이다. 그리고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산의 높이만큼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산과의 거리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빌딩까지의 거리로 착각하여 L1만큼만 걷고 빌딩 높이만큼만 오르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당연히 실제는 그렇지 않다. 자기가 올라야 할 높이와 거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렇듯 스냅 사진같은 우리의 시각과 세상을 보는 방식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구름에 가린 산은 높고 커 보인다. 구름이 입체감을 부여해서 더 크게 높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산에 구름이란 존재가 있다면, 미래와 그 목표에는 모호함이 있다. 미래의 불확실성은 마치 구름 같은 존재이다.
미지의 것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목표가 보이지 않는다면 그 목표에 대한 느낌은 아예 없거나 숭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걸어둔 자신의 목표에 대하여 그 모호성 때문에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른다.
산에 걸린 구름이 산의 높이를 착각하게 하듯이 미래 역시 그렇다. 결국 구름 걸린 산은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는 대로 경험하려 하고, 그 경험 속에서 세상을 다시 구성한다.
높아 보이는 산은 우리에게 등정의 대상이 되면서 하나의 이미지로 투영된다. 그 이미지는 목표일 수도 있고, 자기가 직면한 장애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산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 산을 제대로 보려는 자세이다. 산과 같은 목표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표상이 되고 결국 다양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상을 제대로 보기위해서는 빌딩은 빌딩이 있는 대로, 산은 산이 있는 대로 바르게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물을 보이는 대로 그리려는 원근법은 결국 보이는 대로만 표현하기 때문에, 사물의 실제 모습을 왜곡하게 된다. 산의 표상이 빌딩이듯이 삶의 표상은 결국 하나의 스냅샷 같은 것이며, 이로부터 벗어나 실재의 진면목을 보기위해서는 참된 지혜가 필요하다.
참된 지혜가 바탕이 될 때 우리가 세운 목표는 가상의 목표가 아닌 진정한 목표가 될 것이다. 따라서 목표가 목표이기 위해서는 다만 표상으로만 그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이 목표로 한 산을 다만 빌딩이 있는 곳으로 착각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큰 서원(誓願)을 세우라는 말이 있다. 즉, 목표를 크게 가지라는 얘기이다. 서원의 목표는 그냥 표상적인 목표가 아니다. 지혜와 자비에 바탕한 진면목으로서의 목표이다. 굳이 숭고한 목표만이 진정한 목표라는 것이 아니다. 착각의 여지를 없애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세상에 던져진 모든 목표는 소중하다. K2 정상을 목표로 한 이들은 K2 정상을 오르게 될 것이다. 설혹 못가더라도 그 정상의 근접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한 K2 베이스캠프를 목표로 한 이들은 K2 베이스캠프를 가게 될 것이다. 둘의 차이는 다만 서원의 차이이며 그래서 모두 소중한 삶의 의미로 남게 될 것이다.
라만차의 사나이 돈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달려든 이유는 과연 무얼까? 풍차를 거인으로 착각한 표상의 오류였을까 아니면 지혜의 부재였을까?
그 진정성은 그의 몫이겠지만 최소한 원근법적 오류는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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