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점


섬은 점처럼 다가왔다.

육지가 희미한 선으로 남다 차츰 사라져 가듯이.

섬은 온갖 상상을 자극하다 홀연히 나타났다.

멀리 보이던 희미한 점이 제형체를 갖추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섬은 점이 되었고, 점은 점차 뚜렷한 선이 되었다.


기다렸던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슴 졸였던 순간들은 무엇이었던가.

그리고 지금 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저 점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삶의 애매한 점은 어느 순간 의미가 되었다.

거대하고도 모호하게 우리 곁을 맴돌던 의미없음은 차츰 의미가 되어갔다.

어찌할 줄 모르던, 다만 기다리고만 있던, 초조함에 숨죽였던,

그 들떠짐에 스스로 지쳐갔던, 타는 가슴을 쓸어내렸던,

그 순간은 점이 선이되고 선이 섬이 되는 순간처럼 그 전의 모습이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뚜렷이 점이 현실로 되는 순간이 단지 환희만이 아니었다.

다만 마냥 기다렸던 비겁함에, 생각했던 대로만이 아닌 이질감에,

그리고 이런 앎조차 곧 별 의미 없이 지나쳐감이 두려워졌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마음 또한 희미해졌다.


육지처럼 닻을 내린 섬은 점처럼 간단하지도 명료하지도 않았다.

또 다른 애매함이었다. 묘한 기류로 주변을 맴돌았다.

시간이 흘렀고 애매모호함이 더욱 두려워졌다.

오로지 좁은 길만 보이던 산길에 능선줄기라도 쳐 올라서면 좀 더 확연히 보이던 그 기다림.

좀 더 명료하게 되어가는 그런 미학을 잊었던 것 같았다.


점은 이제 선이 아니다. 섬은 이제 섬이 아니다.

아직 모두 모호한 경계 위일 뿐이다.



II. 경계


하나의 경계에서 바뀐 삶으로 넘어가려는 자는 먼저 그 진정한 맛을 보기 전 간을 보기 마련이다.

지금까지 여러 삶이 그러지 않았던가?

그 바뀌려는 삶은 일상의 반복일 수도 있을거고, 대단한 결단일 수도 있다.

아니면 여러 괴로움으로 몸을 어지러이 비틀거리다 일어나 한발자국 내딛는 고행일 수도 있을거다.


그래서 세상 밖으로의 여행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않든 결단하는 순간, 여행이 되고 여행이 되는 순간 이미

세상 밖에 서있게 된다.

일전에 누군가가 하나의 문이 닫히는 때 다른 편의 문이 열린다고 했지만, 닫히는 문과 열리는 문은 같은 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 역시 동일하다. 즉 같은 문이자 같은 순간인 것이다.


어찌보면 목마름이 여행하게끔 부추기고, 여행하는 자를 홀로 걷게 하고, 홀로 사색하게 한다.

이때의 목마름은 보통의 욕망이 아니다. 욕망 이전의 원초적 충동이다.

그러고 보면 여행은 수행이고 수행은 여행이다.


그것은 경계에 서있는 자에게서 좀 더 명확히 드러난다. 경계에 선 자는 자신의 목마름을 모아 하나의 빔으로 응축한다.

그래서 어디로든 그 뿜어나오는 원초적 빛을 내비출 준비를 한다. 그 때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거다.

이러저러 잡동사니들은 저절로 따라오며 원초적 빔은 어딜 가든 그의 곁에서 그처럼 빛난다.


이제 세상과 객(客)은 하나다. 길은 객 속에 있고, 험한 여정은 더 이상 염두에도 없다.

그래서 세상을 제대로 보기위한 진정함 속엔 더 이상의 물음조차 없다. 떠난 자만이 그 너머를 직관적으로 응시한다.

어느 때 물음은 모호함으로, 모호함은 물음으로 대치되지만 놀랍게도 늘 이 모호함의 결말은 경계 너머에만 있다.


모호함 답지 않게 너무도 명료해서 찬란할지도 몰랐었을,

찬란한 경계 너머의 그 ...



III. 세상


경계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세상의 모습.

목적없는 이유, 이유없는 목적를 넘어 펼쳐진다.

실체와 공허가 섞여 타버린다.


그 정적은 깊은 서글픔을 애써 뛰어넘은 세계다.

고요... 찬란한 정적일뿐.


그저 찬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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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