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추워진다. 밤새 추워서 침낭을 얼굴까지 뒤집어 쓰고 자면서, 변변한 침낭도 없는 랄은 얼마나 추울까 생각하였다.

추위만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다. 고소적응이 되었다 해도, 4000미터를 넘어선 고도에서는 숨쉬기가 조금씩 힘들어 진다.

오늘 갈길은 그다지 멀지 않으나, 높은 고도가 부담은 된다.

 

내일 새벽에 쏘롱라(Tholung la, 5416m)를 넘어야 하기 때문에 오늘 되도록이면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서 자기로 하였다. 쏘롱라 고개 밑에는 두 곳의 머물데가 있는데, 쏘롱페다이(Thorung Phedi, 4450m)와 쏘롱페다이 하이캠프(Tholung Phedi High Camp, 4660m)가 그 두 곳이다. 페다이(Phedi)는 고개 밑의 기슭(foot)이라는 의미다.

내일 좀 덜 걷기 위하여 200여미터 높은 하이캠프 가서 자기로 하였다.

내일의 일정은 그야말로 힘든 일정이기 때문이다. 고도를 약 1000미터를 높혀서 고개를 넘은 후 고개로 부터 다시 1600미터를 낮추어 묵티나트(Muktinath, 3800m)까지 가야 하기 때문이다.

걷는 거리도 거리지만, 고도를 1천미터 높혀야 하는 것이 모두에게 아주 부담이 되는 것이다.

사실 많은 트레커들은 하이캠프에서 보다는 200미터 낮은 쏘롱페다이에서 잠을 잔다. 상대적으로 낮은 고도 때문이다. 특히 밤에 고소증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잠을 아래서 자고 그 다음날 아침 3-4시에 일어나서 트레킹에 나선다.

랏지 밖으로 얼핏 보이는 밖의 날씨는 화창하기 이를데 없다. 입맛도 별로 없어서 커피와 짜파티(밀가루 그냥 구운

빵)로 때우고 8시30분경 출발한다.

 

화창한 날씨 덕에 멀리 산은 낮고 가까와 보인다. 저 멀리 쏘롱라 가는 길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 야크카르카를 떠나며 - 앞쪽이 쏘롱라 가는 길>

 

일단의 캠핑그룹 포터들이 앞서가고 있다.

포터들 사이로 16-7세 되는 소녀 2명이 눈에 띄인다. 트레킹 내내 드물게 보는 어린 소녀 포터들이라, 인사를 건네며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말에 한 소녀는 반갑게 웃으면서 응락을 하지만 옆의 소녀는 시쿤둥하면서 눈에 힘을 준다.내키지 않은 표정이지만 포즈를 취해주었다.

 


< 맑은 눈빛의 애띤 소녀 포터 >

 

소녀포터들이 나중에 쉬는 동안 가서 들어보니 대략 30Kg 정도 되는 것 같다.

내 짐의 2배다. 가슴이 아팠다.

사실 네팔 포터들의 나이는 가늠하기 어렵다. 거의 대부분이 남자인데다, 사오십대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20대후반이나 30대 초반인 경우가 많았다. 몇십킬로그램의 짐을 지속적으로 메고, 게다가 영양부족으로 인하여 조로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도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포터같은 일자리를 얻는 것이다.

 


 

멀리 흰색의 설산이 조금씩 가깝게 보인다. 바로 그곳이 내일 아침 넘게될 쏘롱라 옆에 위치한봉우리 야카와캉(Yakawakang, 6482m)이다.

 

언덕을 넘어서니 평원이 펼쳐지며 또 다른 풍경이 나타난다. 출루웨스트(Chulu west, 6485m)와 그 옆에 출루 중앙봉(Chulu Central, 6584m)도 살짝 모습을 내보인다.

 


 

좌측편인 계곡 쪽으로는 야크들이 자유롭게 방목되어 추위에 거의 사라진 풀들을 찾아내어 뜯어 먹고 있다. 희한하게도 아주 작은 연못도 보이는데, 물이 아주 맑고 투명해서 신기하기만 하다.

 



 

다시 돌아온 길을 뒤돌아 본다. 나는 거대한 산맥인 안나푸르나 연봉을 등지고 걷고 있다.

마낭에서 처럼 느껴지는 압도감은 없지만 멀리 있는 안나푸르나3봉과 강가푸르나는 주변의 구릉과 어우러져 별쳔지를 만들고 있다.

 

걷는 동안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숨이 차고, 머리 속의 생각은 실처럼 엉크러져 있다.

두통의 원인이 고소로 인한 것인지, 몸이 안좋아 아픈건지, 오늘따라 생각이 유난히 많은 건지 가늠하지 어려워진다. 휴식만이 살 길이다. 잠시 휴식하며 사과를 먹으니, 머리아픔이 가라앉으며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진다.

어느덧하염없이 멀리 설산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나를 사색에 잠기게 하는 것은 내자신이 아니라 이런 대자연이다.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나로 부터가 아니라, 바깥으로 부터 느껴지는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몇명의 트레커들과 포터들 모두 조용히 앉아서 설산을 바라보고 있다.

재미있게도 1년전 끊은 담배가 피고 싶어졌다. 다시 심호흡을 몇번 하며 기운을 내린다.

 


 

많은 트레커들이 올라오면서 우리를 지나치고 있다. 대부분 유럽쪽에서 온 트레커들이다. 미국인들은 안나푸르나가 여행금지 권고 구역이기 때문이다.

 


 

이들은포터를 따로 고용하기 때문에 짐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래도 발길의 무거움이 느껴진다.

한굽이를 돌아가니 자르상 계곡은 아주 좁아져서 개울물 수준으로 좁혀져 있다. 계곡을 넘어가서 급경사를 올라가니 쏘롱페다이로 향하는 길이 좌측 급경사에 걸쳐져 직선으로 나있다. 산사태 지역을 통과한다.

이곳의 지형들은 지구 같지가 않고 마치 다른 행성의 일부같다. 황량하면서 묘한 분위기이다.

 



 

야크카르카에서 3시간 남짓 걸어서 마침내 쏘롱페다이에 도착하였다. 많은 시간을 걷지 않았음에도 피곤함이 느껴진다. 쏘롱페다이에 있는 랏지들의 규모는 상상외로 크다.

 

 

고개를 넘기 전 많은 트레커들이 여기서 묵어야 하기 때문에 이런 대규모의 랏지가 두세개 존재한다.

점심을 먹은 다음 하이캠프로 올라가기로 하였다. 물가가 장난이 아니게 비싸다. 계란 볶음밥이 다른 곳의 2-3배 이상 가격이다.

오후 12시에 하이캠프를 향하여 출발한다. 오르는 길은 아주 가파르고 위압감을 준다.

 


 

가파른 길을 나서자 호흡이 급격히 가빠지며 고소증의 한 형태가 나타난다. 재밌게도 이번 고소증은 산소에 목말라하는 육체의 고통을 통하여 정신이 이성의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만든다.

머리속에서 물음과 대답들은 끝없이 반복된다. 그 속에는 내가 여기 온 이유도 있고, 저 고개를 넘어선 후 맞서야 할 세상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가슴 아픈 삶의 단면을 슬퍼하기도 하고, 빌거나 베풀어야 할 용서같은 숙제도 떠온다.

현재의 고통을 전가할 대상을 찾기도 한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후회하더니, 곧 고통의 원인이 육체의 것인지 정신의 것인지 헷갈려 한다. 마침내 고단한 삶이 내 인생의 전부였다고 몰아가면서 격렬한 분노의 감정이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든다.

길가에 그냥 주저 앉았다.머리가 깨지는 것 처럼 아프며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다.

심호흡을 하며 미친 말처럼 제멋대로날뛰는 생각을 억지로 멈추고 시간을 보았다.고작 30분이 흘렀을 뿐...

상태가 별로 안좋은 것을 눈치챈 랄이 다가오더니 내 배낭의 짐을 덜어서 자기가 가져 가겠다고 한다.

조금 쉬어서 괜찮다고 하면서 랄에게 걱정말라고하였다. 잠시나마 두통으로 인한 심마에 빠진 것이다.

 

마음을 추스리고 다시 30여분 올라가니 드디어 하이캠프(4660m)다. 아래서 부터 1시간 조금 더 걸려 도착.

고도차는 200여미터로서 얼마 되지 않지만, 고소증이 유발되는 상태는 훨씬 심하다.

랏지에 방을 얻고, 힘을 내어 랏지 옆의 조그만 봉우리(4750m)에 올라간다.

멀리 아래에 쏘롱페다이의 랏지가 보인다. 마치 우주기지 같다.

 


< 하이캠프에서 본 쏘롱페다이의 랏지 >

 

방금전 여장을 풀은 랏지 뒤로 쏘롱라를 향하는 길의 자취가 보인다.

 


< 숙소인 하이캠프와 그 뒤로 쏘롱라 가는 길이 보인다 >

 

랏지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다. 엄청 춥다. 다른 지역의 랏지와 달리 난방을 할 땔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정도 고도에서는 나무가 없다. 따라서 가솔린을 써서 음식을 한다.

저녁으로 몇일 동안 아껴왔던 비장의 음식을 먹기로 했다. 입 맛도 없고, 체력도 바닥인 경우에 힘을 주는 대표적인 음식 - 바로 신라면이다.

주인의 양해하에 주방에서 직접 라면을 끓여 몇 젓가락 먹어본다. 감동의 도가니다. 오죽하면 먹다가 사진까지 찍었으랴...

 


 

너무 추워서 주인이 소장한 럭시(네팔술)를 한컵 사먹는다. 고소증에는 좋지 않으나, 한잔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랄도 한컵 시켜주었다.

내일 아침 5시 출발이 목표이므로 아침에 먹을 음식(삶은 계란과 죽(포리지) )을 미리 시켜놓았다. 7시경 너무 추워서 방으로 들어간다. 방이라곤 하지만 사방에 벽돌 쌓아놓은 곳에 나무침대 들여놓은 공간이다. 그래서 바깥과 기온도 비슷하다.

드디어 반환점의 마지막 밤 - 추위와 고소증과 악몽에 시달리는 긴긴밤이 시작되고 있다.

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