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으로 길은 끝없이 펼쳐져 있다. 그러나 사방이 어딘지 알아 볼 수 없음에도, 걸어야 한다는 강박만이 뇌리에 가득하다. 그리고 하염없이 걷는다. 발자국 소리가 쉴새없이 들려온다. 쉬고 싶어도 쉴수 없다. 끊임없이 계속 걸어야 할 고통뿐...'

 

 

숨이 차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고 귀에서는 맥박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리고 발이 너무 시렵다.

7시30분경억지로 잠을 청해 겨우 잠에 들었다. 깨어서 시간을 보니 고작 9시반. 온도계를 보니 영하권이다.

침낭을 열고 발쪽에 옷을 더 집어 넣고, 옆에 담요 몇장 덮고 자고 있는 랄에게 안춥냐고 물어보았다. 랜턴 빛에 비친 그는 억지로나마 희미하게 웃는다.

 

다시 잠을 청하였다. 동일한 패턴의 끝없는 길이 다시 펼쳐지며,다시 끝없는 걸음의 세계로 향한다.

이렇게 밤새 걷는 꿈에 시달리며 빨리 아침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나 막상 일어나야 할 시간인 4시가 되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5시 넘어서 겨우 몸을 일으킨다.

아침을 먹으며 랄에게 간밤의 긴 꿈으로 인해 한숨도 자지 못한 것같다고 얘기하였다. 랄은 웃으며 자기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었다고 한다. 고소증세라면서, 아마도 마낭에서 하루 쉬었다 왔어야 했다고 덧붙이며...

6시에 출발한다. 아직 밖은 어두우며 아주 춥다.

조금씩 출루웨스트 봉우리 쪽이 밝아오며 세상의 눈이 떠진다.

 


 

30여분이 지나자 날이 밝아짐에 따라 길도 환해지며 시야가 트인다.

아무 것도 없는 산에 지나온 길만 멋 대가리 없이 펼쳐져 있다.

 


 

바람이 불어온다. 흙모래 섞인 바람이 지나가며 온몸을 꽁꽁 더 얼린다.

얇은 장갑 두개를 같이 끼었음에도 손이 시려서 스틱 잡기도 힘들다. 기다렸다는 듯이 티하우스가 앞에 나타났다.

아래 하이캠프로 부터 1시간 거리에 적당히 위치한 티하우스. 안에는 추위와 고소증에 지친 트레커들이 네팔에서 가장 비싼 밀크티를 먹고 있다. 지친 우리도 동참하였다.

 

 


< 티하우스 >< The long way >

 

 

설산이 더 가까운 높이지만, 설산은 더 멀어져가고, 꿈속처럼 동일한 패턴의 길이 계속된다.

 

다시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지며, 괴로움이시작되고 있다.

꿈속에서 처럼 세상엔 아무도 없는 느낌과 함께 적막함이 밀려오고 있다.

이런 종류의 감정은 호수에 떨어뜨린 돌에 의한 파문과 같이 급격히 확산된다.

수면위의 파도는 이리저리 밀려다니며, 마음의 상처를 건든다. 돌은 파문만을 남기고 바닥에 가라앉아 사라졌지만, 수면위의 마음은 끊임없이 흔들리며 밀려오는파도에 갈기갈기 찢기고 있다.

그 놈은 독하고 또한 집요하게 가장 취약한 부분을 먼저 공격하고 나타난다. 그 집요함의 배후엔 바로 마음속에 그어진 깊은 상처가 자리잡고 있다.

끝없는 길은 끝없이 이는 번뇌의 파도와 합세하여 잔인하게 공격한다.

마음 속에서 이 지긋지긋한 고통을 끝내고 싶다고 하며 외친다. 해원하고 싶다고... 용서하고 싶다고...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한다. 올챙이는 개구리가, 애벌레는 나비가, 상처받은 인간은 완전한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성이다." - Ellen Bass

 

 

사실 육체의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머리속에 이는 격랑에 비하면 말이다.

그리고 가끔 아주 가끔 육체의 고통은 고맙게도 머리 속의 파동을 잠재워주기도 한다.

지쳐가는 육체는 천천히 고단한 마음을 잠 재워준다. 고통에 찬 육신의 행보로 인해 숨이 턱까지 차오르길 반복하다 일순 물감이 번지듯 머리속이 허옇게 변해간다. 그러더니 텅비어 간다. Fade out...

연이어 괴롭히던 생각의 흐름이 끊어지며, 천지간에 내 귓속의 맥박과 거친 내숨소리만 들린다.

더 이상 파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온 천지간은 적막함만 가득할 뿐이다...

무심하게...

 

 

 

이렇게 5000미터를 넘어섰다.

남은 길은 지친 영혼을 달래듯이 발이 알아서 데리고 갔다. 랄이 앞선 길을 따라서...

 


 

멀리서 부터 보이는 쏘롱라를 알리는 티벳 고유의 깃발표식(룽다와 타르쵸)은 가까이 오지 않아 지친 사람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하이캠프를 출발한지 3시간 조금 지나 마침내 쏘롱라에 도착하였다.

 


< 쏘롱라(Tholung La, 5416m) >

 

의외로 이 높은 고지에 티하우스가 있어 안을 들여다 보니 트레커 몇명이 차를 마시고 있다.

밖에는 앞서 온 트레커들이 자축의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쏘롱라를 알리는 팻말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작은 팻말은 칼리간다키강과 다울라기리의 지맥을 배경으로 덩그라니 서있다.

 


< Tholong Pass, 5416m, 17593ft.>

 

쏘롱라는 좌우 양쪽에 두개의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야크카르카를 지나면서 부터 보이던 설산이다.

북쪽에 있는 봉이 야카와캉(Yakawa Kang, 6482m)이고 남쪽에 있는 봉이 카충캉(Khatung Kang, 6484m)이다.

 


< 야카와캉(Yakawa Kang, 6482m) ><카충캉(Khatung Kang, 6484m) >


 

이제는 내려가야 한다.

왠지 서운함도 없다. 지친 몸과 마음의 그늘이 크기도 하지만 산중은 이상하게도 쓸쓸하게 보였다.

에베레스트에 있는 촐라패스의 화려함도, 티벳고원의 광활함도 없다.

트레커들이 바글바글 하지만 산은 온통 정적에 잠겨있다.

그저 찬란할 뿐...

누군가 그랬다.

삶의 고개에서 바라보는 또 다른 세상의 모습.

목적없는 이유, 이유없는 목적를 넘어 펼쳐진다.

실체와 공허가 섞여 타버린다.

그 정적은 깊은 서글픔을 애써 뛰어넘은 세계다.

고요... 찬란한 정적일뿐...

그저 찬란하라...

 

 


 

세상은 그냥 존재하고...

지친 나의 소견만이 허탈한 쓸쓸함에 싸여있을 뿐이다. 육조 혜능 대사의 말씀처럼...

 

두 승려가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이야기한다. 한 승려는 ‘바람이 움직인다’라고, 또 한승려는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며 끝없는 토론을 하고 있었다. 육조 혜능은 그 두 승인에게 말한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내려가는 길은 급경사의 길이었다. 부석부석한 작은돌과 흙이 섞인 길을 따라 고도 1600미터를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무엇보다도 무릎에 대단한 고통을 가한다. 반면두통과 고소증이 사라져갔다.

3시간에 걸쳐 하산을 하였다.

조그만 티하우스에서 잠시 쉬어간 후 오늘의 목적지인 묵티나트로 향한다.

 

다 내려와서 넘어 온 쏘롱라 고개를 올려다 보았다. 고개는 보이지 않고 그냥 거대한 산의 일부로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평지를 한참을 걸어 묵티나트에 도착하였다. 날씨는 덥고, 주변의 풍광은 정답고 아름답다.

힌두교와 불교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는 아주 오래된 도시이다.

내려오는 길에 잘라메이(Jwala Mai) 절에 들렀는데, 법당 내부의 벽난로 같이 생긴 곳에서 물이 흐르고, 불꽃이 같이 나오고 있다. 상당히 신기한 모습이었다. 또 다른 절(Vishnu temple)은 둥그런 원형의 벽에 108개의 물길을 만들어 분수같이 보이게 하였다.

 


< 묵티나트의 한 Temple >

 

 

더 볼곳이 많았지만,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긴 여정에 비해 아주 이른 시간인 오후 1시경 랏지에 묵었다. 점심을 시키고 일주일만에 샤워와 빨래를 하였다.

점심식사 후 확실하게 휴식을 취하면서 랄에게 물어보았다. 너도 고소증에 시달리냐고...

씨익 웃으며 가끔 그런 경우가 있다고 한다.

맥주를 한잔 하며 저 산을 넘어 온 것을 자축하였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산이 있다.

그 산엔 자신만의 고개가 있고 계곡이 있고 치러야 할 땀과 눈물의 짐이 있다.

고개를 만나면 넘어야 하는 거고, 벼랑을 만나면 맞서야만 하는 거다.

수많은 물방울들이 위로부터 내려와 튀고 모여서 개울이 되고 강이 되어야 하듯,

세월의 자국과 감정의 편린들은 모여서 강물처럼 흘러가야 한다.

그래야 또 다른 것을 받아 흘릴 수 있으리니...

 

 

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