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탈라궁에 대한 나의 기억은 무협소설로 부터 시작된다.
수많은 무협에서 포탈라궁은 포달랍궁(布達拉宮)으로 표기 되어있으며, 기괴한 무공과 경우에 따라서는 사악한 무공의 본산이기도 했다.아마도가공의 세계에서티벳불교가 밀교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재밌게도서장(西藏)이 티벳이라는 것을 무협을 읽으면서도 연관짓지 못했었으니...
몇일 동안 포탈라궁앞만 왔다가다 하다가, 드디어 올라가는 날이다.
날은 흐려있고, 그래서 그런지 궁앞을 지나가는데 더욱 커보인다.
궁의 왼쪽편에 도착하니 표를 일괄 끊고, 걸어가는 대신 옆문으로 차를 타고 올라간다. 찻길이 있는게 신기했다.
차에서 내려 궁의 입구까지 조금 걸어올라간다. 이쪽에서 보는 궁은 또다른 모습이다.
성채같이 솟아 있다.
입구로 들어가니, 13층중 7층이라고 한다. 즉, 중앙부에 도착한 것이다.
밖에서 보는 것과 확연히 다르다. 하긴 100층짜리 건물의 안에 들어가서100층의 위용을 바라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 포탈라궁의좌측편 모습 >
포탈라궁은 13층으로 이루어져있으며, 115미터의 높이로 솟아있다. 물론 건축물로만솟아있는것은 아니다. 야산을 이용해서 건축한 것이다.주변의 평지보다 130미터 높은 이 작은 산은 마포리(Marpo Ri)로 불리며 이 산을 이용해서 절묘하게 건축한 왕궁이다.왕궁의 길이는 400미터 가까이 되며, 그 폭도 100미터가 넘는다.
어떤이는 건축10대 불가사의중 하나로 꼽기도 한다.
또한 포탈라궁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천차만별로 틀리다.
< 홍궁과 백궁으로 이루어진 포탈라궁>
포탈라궁이 만들어진 배경은...
원래 5대 달라이라마 이전에는 드레펑사원(Drepung Monastery)내의 간덴포트랑(Ganden Potrang)이 달라이라마의 거처인 동시에 티벳불교의 중심이었으나, 17세기들어 티벳이 다시 하나로 통일되면서 5대 달라이라마가 불교뿐아니라 정치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된다. 달라이라마가 티벳을 종교적로 뿐만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통치하기에는 드레펑사원은 너무 좁았다. 또한 라사 주변에 있는 다른 사원들과의 역관계상, 다른 대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결국, 정치와 종교 양면에서 상징성있는 곳으로 라사의 중심부에 있는 포탈라궁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미 포탈라궁의 자리에는 이미 7세기 티벳을 일통한 송첸감포(Songtsen Gampo)왕이 건설한 왕궁이 있었고, 이를 이용하기로 하였다. 포탈라궁을 대대적으로 보수, 증축한 5대 달라이라마는 드레펑사원에서 포탈라궁으로옮기게 되면서, 포탈라궁이 티벳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포탈라궁은 두개의 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백궁(White palace, Potrang Karpo)이고 하나는 홍궁(Red palace, Potrang Marpo)이다. 백궁은 달라이라마가 거처하는 곳이고 정치의 중심지이며 홍궁은 사원으로 이루어져있다.
포탈라 궁안에는 8분의 달라이라마의 유체가 모셔져 있으며, 달라이라마의 전용사원, 대학, 대법당, 연회장(Hall), 영탑전, 밀실, 식량저장실, 보물방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궁내부는 수천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궁내부로 들어가니 사진촬영금지란다.
수천개의 방이 있지만, 공개되는 방은 몇 십개에 불과하다. 몇대에 걸친 달라이라마의 영전과 경전이 있는 방과 14대 달라이라마의 집무실 정도만 공개되는 것.
1시간에 걸쳐 이곳 저곳을 보는데, 승려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몇몇 방에서 앉아 있는 승려들을 발견했지만, 경전을 외면서 donation을 받고 있는 소수일 뿐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방저방을 기웃거리며, 설명을 듣고 있다.
엄청난무언가를 기대했었는데, 어제의 찜찜한 기분의 연장선이다. 이게 과연 포탈라궁의 참모습일까라는 생각도 들고... 못가는 곳이 너무 많다. 금지된 다른 곳을 가봤자 전부 비슷한 구조라는 말도 들리고...
궁내부는 방향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방속에 방이 있고, 미로처럼 길이 얽혀 있어서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다. 그리고 대부분 깜깜하고, 야크기름으로 태우는 초의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일전에 읽은책에서, 달라이라마가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포탈라궁의 수많은 방들이 어릴적 두려움의 대상이었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몇몇 방중 5대, 13대 달라이라마의 영탑이 모셔진 곳이 대단하였다. 아울러 쫑가바 모셔진 방과 큰 만달라가 있는 방도 인상적이었다. 한 1시간 지나니 훤한 곳이 나온다. 휴게실이다.
휴게실 내부에는 중국의 일인자였던 강택민이 쓴 글이 허울좋게 걸려있다.
민족단결을 수호하고, 민족문화를 고양한다?
제국주의는부르짖는게어찌 그리도 똑같은지...
옥상으로 향한다. 옥상에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돈을 더 내야한다.
옥상에서 본 포탈라궁은 또 다른 모습이다. 조캉사원의 옥상처럼 아름답게 금색 지붕이 빛난다.
옥상에서는 또한라사 시내의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날씨가 흐린데다가 안개인지 공해인지시계가 뿌옇다. 멀리 5천미터 넘는 산들이 가깝게 보이고, 새롭게 지어진 건물들이 주변에 많이 있다. 중국에 의해 만들어진 인민광장도 보인다.
< 라사 중심부 쪽의 거리 > < 포탈라궁 정면의 인민광장 >
옥상에서 내려와 현 달라이라마인 14대 달라이라마의 거처와 접견실을 지나간다. 아무도 현재의 달라이라마의 거처가 거기라는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티벳에서는 14대 달라이라마의 초상화가 금지되어 있고, 이름을 거론해서도 안된다고 한다. 특히 포탈라궁 내부에는 워낙 감시가 심해서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 백궁과 데양샤르광장 > < 달라이라마의 거처 백궁 >
위의 흰 건물이 14대 달라이라마의 거처이자 접견실이라고 한다. 가이드가 내려와서 몰래 귀띔해줘서 알게 됬다.
이 건물이 바로 백궁(White palace, Potrang Karpo)이고, 앞의 조그만 광장이 바로 데양샤르광장(Deyang Shar)이다. 여기서 원래 법회같은 대대적인 행사를 한다고 한다.
아래층으로 몇층 내려오다가 재래식 화장실을 구경했는데, 깊이가 아마도 50미터 이상이 되는 것 같아 이채로왔다. 볼일 볼 때 안 무서웠을까?
어느덧 건물의 외부로 빠져나온다. 올라갈때는 차타고 올라갔지만, 걸어서 내려온다.
걸어 내려오면서 보는 포탈라궁은 또 변하고 있다. 가파른 계단을 돌아 내려와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니 중세의 성보다 더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보인다.
포탈라궁의 정면을 지나, 차가 있는 곳으로 간다. 수많은 티벳인들이 포탈라궁 앞에서 오체투지하고 있다. 너무나도 경건하다. 마니차를 간절히 돌리는 티벳여인의 뒤로 포탈라궁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다.
< 오체투지 >
포탈라궁을 보고 나서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잘 차려놓은 진수성찬을 앞에 놓고 맨밥만 먹은 기분이라고 할까... 그만큼 위대하고 대단하다는 궁전에서 본 것이없었다는 느낌이다. 아무리 많은 부분이 비공개라곤 하지만서도...
나만 그런게 아니었다. 우리 일행뿐 아니라, 나중에 만난 한국여행객들도 비슷한 얘기를 많이 하였다.
서운하고 찜찜한감정을 뒤로하고,오후에 세라사원(Sera Monastery)으로 향한다.
라사에서 북쪽 근교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세라사원(SERA MONASTERY)은 겔룩파(Gelugpa)의 6개 대형(great)사원 중의 하나이다. 겔룩파의 6개 대형사원은세라(Sera)사원을 비롯하여, 드레펑(Drepung), 타쉬룬포(Tashilhunpo), 간덴(Ganden),라브랑(Labrang), 쿰붐(Kumbum)사원이다.
이세라사원 역시 겔룩파를 창시한 쫑가바의 8명의 제자중 한명인 사캬예쉬(Sakya Yeshe)가 1419년 건립하였다.
< 세라사원의 정문 >
세라사원은 티벳의 각지에서온 승려들을 위한 시설이 있었고, 특히 초보(?)승려들을 위한 교육시설로 유명하였다. 따라서 전성기 때 5000명이 넘는 승려가 머물고 있었다고 한다.
아주 큰 연회장인 촉첸(Tsokchen)과 3개의 승가대학, 30여개의 승려숙소로 이루어졌다.
3개의 승가대학 안에는 수십 개의 법당이 있으며, 그안에 석가모니, 미래불인 미륵불, 달라이라마, 쫑가바와 세라사원 건립자인 사캬예쉬가 모셔져 있다.
특히 촉첸은 4층으로 된 건물로서각종 행사가여기서 열리며,5000명이 넘는 승려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다.
세라사원은 현재 몇백명의 승려가 있는데, 법당이나 불상보다는 오히려 승려들의 자연스런 토론장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매일 오후 3시부터 승려들은 승가대학중 하나인 Sera Je 옆마당에 나와서 토론을 한다.일대일 또는 일대 다수로 모여서, 서로묻고 답한다. 왼손을 쭉 뻗고, 우측손으로 마치 배구 스파이크 하듯이 왼쪽팔을 훑어 나가면서 자기가 수행하면서느낀 각종 질문을 한다. 그러면 앉아 있는 승려들은 거기에대한 대답을 해주면서 논쟁을 하는 것이다.
한국불교의 선문답 주고 받는 방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의 구도정신이 너무 진지하다. 수많은 관광객이 둘러싸고 사진을 찍어도 토론에만 열중한다.
처음으로 세라사원에서자유로운 승려의 모습을 보면서, 티벳불교의 맥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흐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중국의 압제도 티벳불교의 맥을 완전하게 끊어 놓을 수는 없었다.성지순례를 오는 수많은 티벳의 순례객들과소수의 승려들에 의하여 그 맥은 위태로우면서도 실날 같이 이어지는가 보다.
세라사원을 나서면서 티벳불교의 정체가 점점 궁금해졌다.
그리고 한국불교와 무엇이 다른지도... 우선 스님들이 입는 가사(옷) 색부터 다르지 않은가?
참고 삼아 월간붓다에 "티벳불교의 역사"에 대하여정리하신 성원스님의 글을 인용해본다.
( 출처 : http://mbuddha.com.ne.kr/200010/2010-7.htm)
불교의 전래
불교는 송첸감포 왕(581∼649)의 말년에 중국과 네팔에서 티베트로 전해졌다고 한다. 송첸감포 왕은 티베트의 문자를 창제하기 위해서 그의 신하 톤미 삼보타를 인도에 파견하였다. 이러한 티베트어의 창제를 통해서 불교의 전적의 번역이 가능해졌다. 정치적으로 송첸감포는 처음으로 티베트의 전체를 통일하였고, 라사를 티베트의 수도로 정했다. 그는 또한 주위의 네팔, 중국과 정략결혼을 하였다. 티베트인은 그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한다.
티베트 불교의 토대 형성
티베트 불교는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의 계율과 금강승의 신앙적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 몽고, 그리고 히말라야 산맥 주위의 국가들에서 믿어지고 있다. 또한,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학자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에 의해서 8세기 티송데첸왕(742∼797)의 후원 아래 정초되었다.
티송데첸 왕은 티데쭉텐 왕(703∼754)과 중국의 금성 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불교를 티베트의 국교(國敎)로 만들었고, 샨타락시타와 파드마삼브하바를 초청하였고,샤메 대사원을 건립하였다. 나란다의 산타락시타는 중관불교의 전문가이고,샤메 대사원의 건축 책임자였다. 이샤메 대사원은 마가다 왕국의 오단타푸리 사원을 모델로 건축되었다. 산타락시타는 설일체유부의 율장을 소개하였고, 그 설일체유부의 계율 전통에 의해서 티베트 초기 불교의 교단이 성립되었다. 파드마삼브하바, 티송데첸 왕, 산타락시타, 이 트리오는 티베트 초기 불교의 성립에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다. 오디야나의 파드마삼브하바는 악신들과 불교에 적대적인 신들을 진무하였고, 그의 족적을 특히 닝마파에 많이 남기고 있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그를 제 2의 붓다로 존경하였다. 현재에도 히말라야 지역의 국가들에서 그는 구루 린포체로 불리어지며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다.
인도 불교와 중국 선종의 논전(論戰)
중국 불교와 인도 불교의 관계는 인도의 학승 카마라시라와 중국의 선승 마하연의 돈점 논쟁(頓漸論爭)에서 대변된다. 카마라시라는 산타락시타의 제자로, 티송데첸 왕의 초대로 인도에서 티베트로 왔다. 티송데첸 왕은 인도의 점수사상(漸修思想)과 중국 선종의 돈오사상(頓悟思想)의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792년에서 794년 초에 소위 돈점논쟁을 주재하였다. 카마라시라는 방편과 지혜의 겸수에 의해서 깨달음이 획득된다는 점수불교를 주창하였다. 이 논쟁은샤메 대사원에서 행해졌다. 카마라시라는 그 돈점논쟁에서 돈오의 주창자인 중국 선종의 마하연 스님을 논파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논쟁 이후에 인도 불교의 영향력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 카마라시라의 논지는 그의 저서 브하바나크라마(수행단계론)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닝마파[古波]
닝마파는 티베트어로 (가장) '오래된 종파'를 의미하고,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최초에 성립되었다. 닝마파는 파드마삼브하바, 비마라미트라, 바이로짜나의 가르침에 기초했다. 닝마파는 족첸(Dzogchen; Mah?sandhi; Atiyoga; 위대한 완성)을 최고 수승한 가르침으로 간주하였고, 론첸파(1308∼1364)는 그 족첸의 가르침을 체계화하였다. 초기 닝마파는 재가 신도와 승려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랑다르마 왕(836∼842)의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11세기부터 불교는 다시 부활되었고, 그 새로운 불교의 전통과 구별하기 위해서 닝마파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닝마파(오래된 종파)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랑다르마 왕의 불교 탄압
초기의 티베트 불교는 랑다르마 왕의 억불정책으로 탄압을 받고, 토착종교인 본(Bon)교의 가르침이 판을 친다. 이 랑다르마 왕은 승려들을 정가에서 추방하고,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적인 원조를 전면적으로 중단했다. 이것을 랑다르마의 불교 탄압이라고 한다. 티베트의 불교는 이 랑다르마의 불교 탄압을 기점으로 구역 불교(舊譯佛敎)와 신역 불교(新譯佛敎)로 통상 구분된다. 그 후 11세기에 불교가 다시 부흥한다. 이 불교 탄압 이후의 불교를 신역 불교라고 부른다. 이 때 카규파와 사키아파가 발전하고, 인도 불교의 주요 텍스트들이 티베트어로 번역된다. 이 텍스트들이 티베트 대장경에 편입된다. 이 티베트 대장경은 칸규르 부분과 텐규르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칸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경장과 율장에 상응하고, 텐규르 부분은 한역 대장경의 논장 부분에 상응한다.
카규파
카규파는 티베트어로 '부처님 가르침의 (구전) 전통'을 의미한다. 이 종파의 핵심적 가르침은 마하무드라[大手印]와 나로파(1016∼1100)의 여섯가지 교리이다. 이 여섯 가지 교리는 여섯 가지의 명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나로파의 제자 마르파(1012∼1097)에 의해서 인도에서 티베트로 전승되었다. 밀라레파(1025∼1135)의 제자인 감뽀파(1079∼1153)는 그 가르침을 카규파의 전통 속에서 조직하였다. 이 전통으로부터 카르마 카규파와 다른 분파들이 생겨났다. 이 종파는 사자 상승에 특별히 무게를 두고 있다. 카규파의 전통은 법신의 화신인 바즈라드하라[金剛持]에서 시작되고, 틸로파(989∼1069)를 거쳐서 나로파에게 전승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번역사 마르파는 나로파의 제자로 이 사자상승의 전통을 티베트에 전승하였고, 그의 제자 밀라레파는 이 전통을 계승하고 그의 제자 감뽀파에게 전승하였고, 감뽀파는 카규파의 가르침을 집대성하였고, 그에 의해서 카규파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된다.
사키아파
사키아파는 사키아 사원의 이름에서 기인한다. 이 사키아는 티베트어로 "회색의 대지"를 의미한다. 콘 콘촉 걀포는 11세기에 이 사키아 사원을 서 티베트에 창건하였고, 그 사원은 회색의 바위 표면 위에 건축되었다. 아티샤(980/90∼1055)의 예언에 의해서 그 사키아 사원은 1073년에 건립되고, 그 사원의 주지와 콘 가(家)의 멤버들은 '방법과 결과(Lamdre; M?rghaphala)'라는 금강승의 핵심 가르침을 전승하였다. 사키아파는 밀교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불교논리학의 문제점도 지적하였다. 13세기와 14세기에, 사키아파는 티베트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키아파는 1092∼1280년 사이에 독립된 종파로 다섯 명의 구루에 의해서 발전하였다. 이 다섯 명의 구루는 사첸 쿵가 닝포(1092∼1158), 그의 두 아들인 소남 쩨모(1142∼1182)와 드락파 겔뵅(1147∼1216), 그의 손자 사키아 판디타(1182∼1251), 그리고 사키아 판디타의 조카 초겔 팍파 (1235∼1280)이다. 이 가운데 사키아 판디타의 영향이 가장 컸고, 그의 학문적 평판이 인도에도 널리 퍼졌으며, 그는 원나라로 초청되었고 초겔 팍파는 쿠빌라이 칸(r. 1260∼1294)의 왕사가 되었다. 원나라는 중앙아시아의 통치권을 이 사키아파에게 1249년에 수여하였다.
겔룩파
14세기 말, 겔룩파가 쫑가바(1357∼1419)와 그의 두 명의 핵심적인 제자인 겔짭(1364∼1432)과 케드룹(1385∼1483)에 의해서 티베트의 4대 종파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성립되었다. 겔룩은 티베트어로 "덕행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1409년 쫑가바에 의해서 창건된 간덴사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문수보살로부터 영감을 얻은 후, 쫑가바는 그의 수많은 주석서에서 찬드라키르티[月稱]의 귀류논증파의 중관학파의 가르침을 자기의 사상체계에서 핵심으로 간주했다. 그는 또한 불교의 수행론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그는 발보리심(發菩提心)을 그의 수행론에서 대단히 강조하였고, 수행론의 체계에서 지관(止觀)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또한 밀교의 가르침이 이러한 평정심의 회복을 위한 특별한 테크닉으로 간주되었다.
이 겔룩파는 아티샤의 카담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추종하였고, 계율의 준수와 논서의 체계적인 연구에 강조점을 두었다. 그 가운데, 람림(Lamrim: 불교의 수행론)과 다양한 불교의 교리적 견해들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이 종파의 핵심적인 과제였다. 이 겔룩파는 티베트의 극서 지방에서 참도, 다르쩨도와 동쪽의 암도 지방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제 3대 달라이 라마 소남가쵸(1543∼1588)가 몽고를 방문한 후, 몽고의 후원으로 겔룩파는 몽고와 러시아 연합의 부리아트 지역에서 국가종교가 되었다. 17세기에 이 겔룩파는 중앙티베트에서 지배적인 정치세력이 되었다. 그 때 제 5대 달라이 라마 카왕 로상 가쵸(1617∼1682)는 몽고군의 도움으로 티베트의 종교계와 정치계를 평정하였다. 이러한 겔룩파의 절대적인 위치는 티베트의 정치와 종교의 영역에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오늘은 여행사와 함께하는7박8일 공식 일정의 마지막 날이다.
내일, 같이 온 일행들은 모두 비행기로 카트만두로 되돌아 간다.
비자 때문에 앞으로 8일 이내에 온길 반대의 육로로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EBC)를 거쳐서 카트만두로 되돌아가야 한다.
8일간 정들었던 다국적의 여행객들과 마지막 저녁식사를 같이 하였다.다들 아쉬워한다.
같이 방을 쓰고 있는 스페인 아저씨도 많이 섭섭해하고...
저녁을 먹고 일행과 헤어져EBC로같이 갈차와 사람들을 찾으러 야크호텔로 갔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탈출(?)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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