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콩코르디아에 도착하자마자 희소식이 들렸다.


곤도고로 패스(5650m)가 열린 것이다.

일주일 동안 올라왔던 발토로 빙하의 거칠고 고된 길을 되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동일한 일을 반복하는 것을 싫어하는 우리로서는 당연히 기쁜 일이지만, 가슴 한구석이 불안해온다.

우리에게는 곤도고로 패스를 넘을 장비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행여나 하는 마음에 K2 BC에서 부산원정대로부터 얻어온 확보용 슬링 5미터가 전부다. 안전벨트는 둘째 치고 아이젠조차 없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가이드북인 Lonely Planet에 의하면 곤도고로 패스는 트레킹으로는 최고의 수준인 Extreme technical 레벨이다. 이미 공산(空山)님은 여기 오기 전 엄홍길씨와 인터뷰를 했는데, 곤도고로 패스에 대해 물어보니 트레킹이 아니라 원정대 등반급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계획에 있던 일이라 안전장비등을 가져왔으나 곤도고로 패스가 막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스카르두에 모든 장비를 놓고 온 것이 후회가 되었다.  그러나 곤도고로 패스를 넘는데 현지 레스큐(Rescue) 팀이 도움을 준다는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곤도고로 패스는 1986년 처음으로 열렸다고 하며 이 루트는 콩코르디아와 후세(Hushe)계곡을 연결한다. 이 루트가 뚫리기 전까지는 모든 사람들이 발토로 빙하를 왕복해야 했으나,이 루트를 이용하게 되면 2일 정도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올라온 길을 내려가야 하는 지루함이 없는 것이 장점이다. 


콩코르디아에서 오르는 루트인 곤도고로 패스의 남서면은 50도 이상의 경사이며 빙벽의 붕괴위험과 크래버스가 있다. 하산 코스인 북동면 역시 경사 50도 이상이며 해가 뜨면 눈사태와 낙석의 위험이 있다.특히 하산시 낙석이 매우위험하므로 이른 아침에 북동면의 위험구간(약 400미터의 고도차)의 하산을 마쳐야만 하는 것이다.


코스의 위험한 곳에는 군데군데 고정 로프를 설치하였지만, 매 시즌 눈사태와 크레버스로 루트가 바뀌므로 그 때 그 때 상황을 보아야 하는 것이다. 실제로 1998년 8월 24일에 눈처마가 무너지면서 두 명의 포터가 목숨을 잃었다고 하며, 나중에 하산해서 알게된 사실은 우리가 곤도로고 패스를 넘은 다음 또 두 명의 포터가 이곳에서 눈사태로 목숨을 잃었으며 다시 루트가 닫혔다고 한다.



곤도고로 패스를 넘기 위한 짐정리가 시작되었다.

가이드인 익바르는 이틀치 식량과 연료만을 남겨둔 채 모든 음식물과 장비들을콩코르디아의 다른 팀에 넘겨버렸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곤도고로 패스를 넘은 뒤 우리는 이틀 거리를 하루에 내려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루치 식량만 가지고 갔던 것이다.익바르가 배수진을 친 것이다. 또한 우리와 함께 곤도고로 패스를 넘을 포터는 4명만 남기고 모두 하산시켰다. 가이드인 익바르 역시 25Kg을 넘는 짐을 스스로 자청해서 맨다.


오늘의 목적지는 알리캠프(Ali camp, 5010m)를 지나 곤도고로 패스 바로 밑에 위치한 '달의 언덕'라는 멋진 이름의

문힐캠프(Moon hill camp, 5140m)이다.

하늘을 찌를 듯한 위용을 자랑하는 미터 피크(Mitre Peak, 6025m)와 K2의 신부인 초고리사(Chogolisa, 7665m) 사이를 흐르는 아름다운 와인빙하(Vigne glacier)를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드디어 출발이다. 하산을 하기 위해 거꾸로 등산을 해야 하는 것이다.

출발 직전 아하마드가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성스런 표정을 짓더니 큰 구호를 외친다. 주변의 나머지 포터들도 큰소리로 따라 외친다. 평소 아하마드의 다소곳하면서도 수줍은 모습이 아니다. 뭔가 비장하면서도 멋있다. 아마 알라신에게 자신의 출정을 알리는 신호이리라.


                                                                           <아하마드 >



                                                       < 가이드 익바르와 4인의 포터>


출발한지 30분도 못되어 미터피크로 향하는길에 빙탑이 나타났다. 길은 빙탑위로 나있고양쪽 사면은 깎아지른 벼랑이다. 조심스럽게 넘어가야 하는 한 뼘 정도의 미끄러운 길이 아슬아슬하다.


                                                           < 빙탑을 넘어서 - photo by yosanee >


출발한지 2시간 정도지나 와인빙하의 초입에 도착하였다. 초고리사의 단아하지만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름답다.




와인 빙하는 발토로 지역의 다른 빙하와는 다르게 얼음이 노출되어있다.

게다가 도중에 빙하의 복병인 크레버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정말로 상상 속에서만 본 투명한 빙하를 빼닮았다.

그리고 하류가 상류보다 폭이 좁아 마치 거꾸로 흐르는 것 같다.

기나긴 빙하 위를 길게 늘어서서 걷고 있는 일행들 또한 아름답다.




오던 길 뒤로 K2를 바라보았다.

K2는 여전히 짙은 구름속에 가리워있고 고드윈 오스틴 빙하만이 K2를 향하는 발자취인양 긴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이제 K2와도 헤어질 시간이다.

몇일 소중히 간직해 왔던 그 모습을 놓아버릴 때가 되었다.놓아야만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도가 치듯이 흘러가는 와인 빙하는 아름답다.

자신 위에얹혀진 돌 조차도 가치있게 만들며 그 위를 걷는 모두를 빛나게 한다.

그리하여 이 황량한 설산을 의미있게 만든다.










와인 빙하의 상류부근에 도착하였다. 빙하가 무한히 넓어지더니 주변의 산들이 모두 스스로 물러난 듯하다.

갑자기 주변의 사람들도 다 사라져가고 고립무원의 빙원 만이 펼쳐져있다.

시간과 공간이 모두 정지된 듯하고 거친 숨소리만 들린다.




아무도 없다고 해도 이상할리 없는 이곳이다.

어디로가야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있는데 우측편 작은 흙더미 사면에서 사람들이 손을 흔든다.

바로 앞에서 못보던 크래버스가 긴 틈을 드러내고 있다.



                                                                          < 알리 캠프 >


알리캠프에 도착하였다. 출발한지 5시간만이다.

알리캠프에는 레스큐(Rescue) 팀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은 내일 우리가 곤도고로 패스를 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한다.

물론 유료다. 고정자일 사용료도 따로 내야한다.

레스큐팀은 곤도고로 패스 너머의 후세마을에서 운영하는 것이다.이 길을 통해서 원정대와 트레킹팀이 자신들의 마을로 넘어와야 관광수입을 벌기 때문이다.



                                         < 초고리사의 북서면으로부터 흘러 내리는 와인 빙하 >



                                                                  < 알리캠프의레스큐 팀>


알리캠프에서 다시 문힐캠프로 출발하였다. 고도차 130미터의 길을 1시간 이상 걸어야 한다.

길도 빙하 위의 길이 아니라 돌무더기 투성이의 너덜길이다. 얼마 걷지않았는데도 한발짝 한발짝이 힘들다.

먼저 문힐캠프에 도착한 포터들이 야영할 터를 고르고 있다.

텐트자리 밑에서 묘한 구린내가 난다. 볼일을 본 듯한 흔적도 있다.

다른 텐트자리가 보이지 않기에 대충 긁어내고 텐트를 쳤다. 여전히 냄새가 나긴 하지만 그냥 무시하였다.



                                                        < 문힐캠프의 텐트야영지 by yosanee >


구름이 몰려오면서 날씨가 점점 차가워진다.

우리야 텐트에서 보낼터이지만 저들은 돌무더기 위에 비닐을 씌워 하루를 보내야 한다.




                                                       < 문힐캠프의 포터 야영지 by yosanee >



이제 곤도고로 패스는 빙하건너 바로 코앞에 있다.

고도차 600미터에 달하는 설벽의 크기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마냥 올려다보니 쉬워 보이기도 하고 어려워 보이기도 한다. 또 그 뒷사면은 어떠한지 궁금해진다.

보면 볼수록 산이 아니라 눈앞에 나타난 환영과도 같다.




                                      < 좌측의 설사면이 곤도고로 패스, 우측의 설사면은 와인(Vigne) 패스 >



이른 저녁 밥을 먹는데 입이 깔깔하여 잘 넘어가지 않는다.

앞으로의 험한 길을 생각하여 억지로 우겨 넣었다. 공산님과 요사니도 비슷한 눈치다.

이 묘한 낯설음이 싫다. 사실 낯설음을 찾아 나선 것이지만 이런 종류의 낯설음은 싫은가 보다.

앞으로 어떠한 길이 펼쳐져 있을지 모르는 불안감 때문일 것이다. 준비되어 있지 않음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익바르가 일정을 말해준다.

오르는 길은 레스큐 팀이 도와줄 것이지만, 고개 너머북동면은되도록 낙석이 없는 이른 시간에 하산하여야 하므로 일찍 출발하겠다는 것이다.

마침 가셔브롬의오스트리아원정대가 곤도고로 패스를 통하여철수한다고 해서, 우리는 그 원정대 뒤를 따르기로 한 것이다.

원정대가 알리캠프에 도착하면 무전으로 알려준다고 했다. 아마도새벽 1시경에 도착할 것이라면서...


우리는 언제라도 출동준비를 갖추기 위해 완전무장하고 슬리핑백 안에서스탠바이하며 기다린다.

그리하여 선잠을 자면서 원정대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7시도 못되어 텐트에 누워있는데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출정전야의 긴장감으로 온 몸이 뻣뻣하다.

선잠이 들었다 깼다를 반복한다. 자는둥 마는둥 뒤척 뒤척거리는데 텐트 위로 사각사각 눈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니 온통 눈발이 날리고 있다. 함박눈이 아닌 마른 싸래기 눈이다.

비몽사몽 중에 차라리 눈이 많이 와서 그냥 왔던 길로 하산했으면 좋겠다는 망상도 떠오른다.

저 산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두려워하고 있는 자신을 보면 사라진다고 했지만 그래도 사라지지 않고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곤도고로 패스를 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두렵게하는 것은 내 안에 침잠되어 있는 그동안 두려워했던 수많은 경험일 뿐이다.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인 것이다. 무시(無始) 이래로 담아온 내 스스로 만든 내용물인 것이다.


긴 호흡을 하면서 떠 오른 문구를 염불하듯 되뇐다.

가슴 졸이지 마라. 너 역시 한 때 저 산과 강의 일부였으니…


텐트 위로 사각사각 마른 눈 오는 소리만이 천지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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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