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스님이 조주(趙州)선사에게 선(禪) 수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교리에 대한 가르침을 청했다. 이에 대해
조주선사는다음과 같이 말했다.“나는 지금 소변을 보러 가네. 이런 일 같지 않은 일 조차 내 스스로 몸소 해야 한다네...”
새벽 나절 가이드 익바르와 포터들은 우리를 위하여 블랙티를 끓인다. 그들이 피우는 버너소리가 아침의 정적을 두드린다.
“Good morning, Sir."라는 첫 마디로 조심스럽게 우리를 깨우면 우리의 하루는새벽 4시반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우리는 왕이다.
오로지 자기 힘으로 걸어야 하는 이 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다.
매 끼니를 그들에게 맡긴다. 우리의 짐도 그들의 몫이다. 그래서 그들을 고용한 덕을 철저하게 본다. 단지 우리가 하는 유일한 일은 걷고, 먹고, 싸고, 자고, 가끔 필요할 때 그들을 조금 거드는 것이다. 텐트치고 걷는 것 같은 소소한 일 말이다.더 나아가 원한다면 걷지 않아도 된다. 자본의 법칙을좀 더 따르면 말과 당나귀 등 위에서 이 험난한 길을 보낼 수도 있다.
이게 발토로빙하에서 돌아가는 생존의 법칙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고로 II(Goro II, 4380m)인데, 우르두까스로부터 12Km 떨어져 있다. 우르두까스와의 고도차는 330m에 불과하지만 비교적 완만한 빙하의 경사를 따르기 때문에 먼 길이다.
오늘부터는 본격적인 빙하 길이며, 또한 빙하 위에서 자게 된다. 어제까지는 빙하 옆의 퇴적지인 모레인(moraine)지대에서 잤지만 앞으로는 빙하 위의 얼음덩어리에서 자게 되는 것이다.
6시 조금 넘어 출발한다. 초반의 흙길이 사라지면서 빙하 위로길이 나있다. 날이 잔뜩 흐려있어서 무더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보기에도 벅차게 솟은 롭상스파이어를 지난다.
발토로 빙하위로 난 길은 수시로 변해서 철마다 길이 바뀐다고 한다. 빙하가 흐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변화한다.
아래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변화가 위에서 큰 변화를 초래한다. 발토로 빙하는 매년 6월~8월 사이에 열렸다 닫힌다.
발토로에서 겨울 시즌에 트레킹하거나 등반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길은 수시로 바뀌지만 매 번 포터와 나귀가 지고 가야 할 짐의 무게는 동일하다.
< 말발굽 교체중 - photo by yosanee>
여기가 빙하지대임을 알려주듯 길은 수시로 얼음투성이다. 스틱으로 찍어서 미끄러운 곳을 겨우 통과한다. 이런 곳이 말이나 나귀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곳이다. 마부는 돌을 던지거나 채찍으로 말들을 독려할 뿐이다.
미끄러운 작은 능선을 넘는 곳이 정체지역이다. 거대한 돌무더기 사이로 또 그 너머로 생명체들이 꾸물거리며 걷고 있다.
앞길에 마침내 빙탑이 나타났다. 빙탑의 높이는 작은 것은 10여 미터에서 큰 것은 100미터를 넘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한겨울에 어디에서나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돌투성이의 너덜길이였지만, 빙탑을 보는 순간 처음으로 여기가 빙하지대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게된 것이다. 한쪽 편에서는 조그만 개울물이 마치 평지처럼 흐르고 있다.
오늘 걷는 길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아니 아무렇지 않은 것이 이상할 수도 있다.
구름은 짙게 드리워있고, 주변의 봉우리들은 모두 그 속에 감춰져 있다. 비나 눈은 오지 않지만 낮게 깔린 구름 때문일까 여러모로 분위기가 가라 앉아있다.
오늘로서 산에 들어온지 6일째이다. 머리가 맑지 않다. 심호흡을 해본다.
몸은 피곤하며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걷는 것이 편하지 않다. 고소증 때문일 수도 있다.
상념의 세계는 내가 보고 상상하는 이미지들의 집합체이다. 아니 내가 구축하려는 세계는 그 집합체 이상이다.
여기서 내가 원하는 것은, 보고 듣고 느낌으로서 자연의 장엄함을 영탄하고, 더 나아가 내 나름대로의 질서를 부여함으로서 이 세계에 동참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념의 세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서져나간다. 생각을 모으기 조차 힘들어진다.
상념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어 나가는 것이 바로 일상이다. 일상의 피곤함과 걱정 등, 이 모든 것이 상념을 방해하고 있다. 나는 사고함으로서 내 생각의 골격을 완성하려 했고, 자유로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그것을 조정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고자 했다.
여행 전의 일상을 돌이켜보자면 그 곳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 해야 할 많은 일들,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소모전들로
뒤범벅되어 있다. 한편 이 곳에서는 온통 삶의 기본 조건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에 모든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다.
하고자 했던 일상의 전환 또는 해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속세의 커다란 번뇌 덩어리들이 있던 자리는 원초적 욕망으로 대치된다. 배고픔, 추위, 건강에 대한 염려, 앞으로에 대한 막연한 걱정이 그것이다.
결국 대자연속에서 하는 일이란 잡념과의 끝 없는 싸움인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를 순간적으로 몰입하게 하는 것도 대자연이다. 대자연에 대한 영탄과 몰입을 통하여 자연과 삶의 본질을 사색하게된다. 진화 심리학자들은 자연에 대한 경탄은 진화 과정의 산물이었다고 한다. 척박한 세상에 살던 우리의 선조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신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가슴이 꽉 막힐 정도로 압도당하는 그런 '숭고한' 느낌을 선호하며, 그를 위하여 많은 댓가를 지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1시경 샥스푼(Shakspoon, 돌더미란 뜻)에 도착하여 간식을 먹으면서 쉬어간다.
역시 일상은 걷거나 먹거나 쉬는 것이다...
오늘의 목적지인 고로 II가 저멀리 보인다. 멀리 보이는 알록 달록한 텐트들이 우리에게 다시 안도감을 준다.
텐트를 치는데 역시나 얼음이 밟힌다. 잔돌로 다져진 텐트자리 밑으로 얼음이 녹고 있어서 결국 비닐을 깔고 그 위에 텐트를 쳤다.
그나마 포터들은 텐트도 없이 돌담을 치고 그 위를 비닐로 씌운 후에 그 안에서 웅크리고 잔다. 열악한 잠자리긴 하지만 그들 나름대로의 노하우가 옅보인다.
< 포터들의 야영지 >
저녁을 먹기 전 무료한 시간에 식당텐트에서 포터들과 함께 카드놀이를 한다. 한쪽에서는 그들이 먹는 주식인 난(밀가루 구운 빵)을 만들고 있다. 해맑게 웃는 그들의 미소에서 동질감이 느껴진다.
< 저녁무렵에야 모습을 드러낸 마셔브롬(Masherbrum, 7821m) >
흙탕물을 한번 휘젓고 나면 큰 것이 가장 먼저 가라앉고 맨 나중에 제일 작은 것이 서서히 가라앉듯이, 평소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먼저 가라앉는 큰 알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게 생각치도 않던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작은 입자가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우리 삶의 질곡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발토로 빙하 위에서 일상은 전도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중요함과 중요하지 않음의 비밀이 드러나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느 선사(禪師)가 말씀하신 것처럼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야 말로 일상에 대한 지고의 경험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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