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9일 맑음 Plateau Hut -> Tasman Lake
5:20분 기상. 오늘은 집으로 가는 날. Aspring Guides팀은 새벽에 정상 공격에 나서고 없다. 서둘러 짐을 싸고, 아침을 먹고, 정리를 하니 제법 시간이 걸린다. 비오님이 먼저 출발하고, 나머지 짐을 정리해 출발한 시간이 7시 10분. 남은 식량은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모두 산장에 두고 장비만 챙겼는데도 거의 30Kg에 육박하는 엄청난 무게의 배낭은 어깨를 짓누르지만, 이제 모든 것을 끝내고 집으로 간다는 생각에 발걸음만은 가볍다.
막 Hut을 나서는데, 정상공격에 나섰던 일행 2명이 돌아오고 있다. 1명이 다리가 좋지 않아 등반을 포기하고 가이드와 함께 하산한 것이라 한다. 역시 정상으로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Hut을 뒤로 하고 평원을 가로질러 Cinerama Col에 올라 우리가 올랐던 산들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한 다음 내리막길로 접어 드는데, 뛰어 넘기에는 너무 높은 크레바스가 나온다. 마침 누군가 두고 간 스노우바을 발견하여, 확보물로 설치, 하강해서 무사히 통과한다.
Anzac Peak를 끼고 돌아 눈 사면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니, 눈은 끝나고 자갈과 모래로 된 내리막 길이 나온다. 내려 갈수록 점점 경사가 급해지더니, 결국 자일을 설치해야만 내려갈 수 있는 지점에 다다른다. 경사진 흙과 자갈로 된 사면에 불안하게 놓여 있는 바위에 어렵게 자일을 걸고 하강을 하는데, 낙석이 수 없이 떨어진다. 정말 마지막까지 긴장을 풀 수 없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내리막길도 끝나고, 거대한 빙하 위로 빙퇴석이 쌓여 있는 모레인(Moraine)지대를 지나 Ball Shelter만 나오면 점심을 먹고 편안히 내려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또 다른 고행 길의 시작인 줄 누가 알았으랴!! 처음 가는 길이니 지도에 있는 위치만을 감으로 잡아 내려가다 보니 원래 길에서 벗어나 한참을 간 것이다.
가도 가도 Ball Shelter는 보이지 않는다. 오후 2시가 넘어서면서 석회석이 있어 뿌옇게 고인 빙하 물이라도 떠서 점심을 먹고 가자는 비오님의 말씀에, ‘석회석이 많이 들어 있어 몸에 좋지 않으니 일단 더 가봐요.’라며 나는 계속 앞으로 전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깨를 누르는 천근만근 무게의 배낭은 더 짓누르고, 진작에 나왔어야 할 길은 보이지 않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Moraine언덕은 우리를 탈진의 지경으로 몰고 가고 있다. 비오님과 나뭇잎은 점점 뒤로 처지고, 나도 정말 이대로 쓰러져서 구조라도 기다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배고픔과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까지 겹쳐 더 이상 전진이 힘들어지자 결국 석회석이 부옇게 섞인 빙하물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벌컥 벌컥 들이키게 된다. 머리 속에서는 ‘마시면 안되!’ 라고 소리치지만, 물통을 잡은 손은 또 입으로 간다. 멀리 어렴풋이 Shelter 비슷한 것이 보여서 ‘Shelter가 보인다.’라고 소리치고 가까이 가 보니 그것은 빙하가 녹아 내려서 생긴 자국이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고, 저녁 9시가 다 되었을 무렵, Tasman 호수가 길을 가로 막고 있는 지점에 이르니 앞 길이 막막하다. 어두워져서 더 이상의 전진은 어렵고 또 피할 수 없는 비박에 들어 간다. 호수 옆 바위 틈에 쪼그리고 앉아 빙하 물에 라면 3개를 끓여 늦은 저녁을 먹는다. 마음 같아서는 3개를 다 먹어 치울 수 있을 것 같이 배가 고프지만, 눈치를 보며 자기 몫만 그릇에 뜬다. 라면 국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순간! 아! 이것은 세상에 태어나서 먹어본 음식 중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다. 면발가닥이 입에서 절로 녹는 느낌이다. 한 그릇도 채 안 되는 량을 게눈 감추듯이 먹어 치우고 난 그 허전하고 아쉬움이란…! 그나마 오늘의 비박은 Mt Dixon에서의 밤에 비하면 호화로운 것이라 위안하며, 잠자리에 든다. 밤새 Tasman Lake로 빙하가 녹아 내리는 소리, 바위와 자갈이 빙하 호수에 떨어지는 소리가 잠을 설치게 했다. 원래 일정대로라면 오늘 Christchurch에서 자고 내일 1:30분 비행기를 타고 Auckland로 가게 되어 있는데, 전화 연락이 안되어 가족들이 걱정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하다.
2월 10일 흐림 Tasman Lake -> Mt Cook Village
새벽에 빗방울 마저 떨어져 많이 심난했는데, 다행이 비는 약하게 뿌리기만 하고 그쳤다. 마지막 남은 식량인 감자 한 개와 양송이 수프로 아침을 때우고, 다시 더 무겁게 느껴지는 배낭을 매고 출발이다. ‘설마 오늘은 집에 갈 수 있겠지!’라며 스스로를 위안해 본다. 우리가 할 일은 단지 빨리 걸어서 이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는 것이다. 날씨가 흐려서 해가 늦게 뜬다. 아침 7시, Tasman 빙하 호수와 오른쪽 급경사의 산비탈이 만나는 가장자리를 따라 전진을 한다. 점점 발을 디딜 틈도 없어 지더니, 급기야 허벅지까지 빠져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길이다. 얼음같이 차가운 물에 허벅지까지 빠지면서 겨우 통과했는데, 설상가상으로 조금 더 가니 큰 바위가 가로 막혀 있어 수영을 하지 않으면 건널 수 없는 지경에 이르니, 다시 뒤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무거운 배낭, 무거운 등산화를 신고 빙하 호수를 수영한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이기에……
정말 울고 싶은 심정이다. 차선책으로 오른쪽 산비탈을 기어 올라본다. 하지만, 6-70미터도 올라가지 못하고 포기한다. 자갈과 모래, 바위들로 이루어진 경사면은 올라가기도 힘들지만, 자칫 미끄러지거나 수시로 떨어지는 낙석에 맞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빙하 호수로 처박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젠 정말 사면초과! 갈 길이 없다.
이제 남은 유일한 방법은 누군가 빙하 호수를 건너 구조요청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냥 앉아서 구조를 기다리다가는 언제 구조될 지 기약할 수 없다. 꼭 필요한 짐만 챙기고 등산화도 가벼운 신으로 갈아 신고 나 혼자서 마지막 희망인, 구조 요청의 길에 나선다.(AM 10:20) 빙하가 둥둥 떠 있는 차가운 호수로 뛰어 들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을 때 심호흡을 크게 하고, 망설임 없이 뛰어 들었다.
숨이 멎어 버릴 것 같이 차가운 물이 온 몸을 감싸는 끔찍한 순간이다. 거리는 10여 미터 남짓이지만, 몇 100미터처럼 멀게 느껴졌다. 물에서 나와 오직 빨리 구조를 요청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정신 없이 계속 걸었다. 젖은 옷의 추위도 잊어 버리고 걷다가 윗옷이 거의 다 말라버렸을 쯤 멀리 보이는 언덕 위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 언덕을 향해 전력을 다해 갔다. 하지만 그 언덕 위에 올라서서 내가 온 길을 다시 돌아본 순간! 허탈감이 몰려 왔다. 우리가 어떻게 길을 잘못 들었는지가 다 보였기 때문이다. 바로 지척에 좋은 길을 두고, 시작 지점을 잘못 들어서 그 고생을 한 것이다. 또 그 언덕 넘어서는 관광객들이 산책길로 올라오고 있고, Tasman 빙하 호수에는 관광객을 위한 모터보트들이 떠 다니기 시작한 모든 모습이 보니, 갑자기 나 자신이 다른 혹성에 온 것처럼 얼떨떨해 진다. 어쩌면 Tasman 호수에 떠 있는 모터보트에서 우리 일행을 발견하고 구조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서 한참을 지켜보았지만, 어쩐 일인지 우리 일행이 있는 쪽으로는 배가 가지 않는다. 일단 차를 주차해 놓은 곳으로 가, 차를 몰고 보트 타는 곳으로 가서 보트회사에 구조요청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차가 있는 곳으로 걸었다.
한참 비포장 언덕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위에서 픽업트럭이 한대 내려오길래 세웠더니 마침 DOC 직원이 타고 있는 차였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구조를 요청했더니, 그 직원도 우리 팀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PM 1:00) 우리가 세워 놓은 차에 갔다가 오는 길이란다. 바로 보트 선착장으로 가서 구조를 요청해 달라고 했더니, 일단 Emergency Centre로 가서 절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차를 몰고 DOC 직원을 따라 Cook Village 에 있는 구조대로 갔다.
경찰을 포함해 긴급상황 처리에 필요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빙하를 수영해서 건너왔다니까 모두가 놀라워한다. 일단 보트를 이용해 구조를 시도할 예정인데, 보트회사의 변호사가 수락해야만 일단 진행 할 수 있다고 한다. 또 우리 일행이 있는 지점이 빙하가 수시로 떠 오르는 지역이라 접근하기에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관광용 보트들도 그 쪽으로는 가지 않았던 것이다. 보트로 접근이 불가능할 경우 헬기를 동원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구조비용은 모두 우리가 부담해야 한다고 하니, 부디 비용 부담이 적은 보트로 구조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Tasman 빙하 쪽은 지형이 지도와는 달리 많이 변해 있어 최근에 촬영한 위성사진에서 우리 팀의 현재 위치를 알려주었다. 걱정하고 있을 가족과 산님에게 전화로 상황을 알려주고, 구조대 내에 있는 샤워장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은 다음, 따뜻한 커피를 한잔 마시니 살 것 같았다. 해마다 사고가 많이 발생하는 곳인지라 구조센터는 체계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어 보였다. 한참 후에 보트회사의 변호사로부터 승인이 떨어졌고, 먼저 정찰을 보내 접근 가능 여부를 판단한 다음 두 대의 보트를 보내 구조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 보트에 탑승하는 사람들도 배가 전복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모두 Wet suit를 입고 간다고 한다. 내 마음처럼 빨리 일이 진행되지 않아 답답했다. 하지만 기다리는 수 밖에……
진행상황을 전화로 알려줄 테니 일단 숙소로 가서 기다리라고 한다. 내가 옆에 있어봐야 신경만 쓰이고 일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일단 Unwin Hut으로 갔다. 하지만 전화 수신도 잘 안 되는 Unwin Hut에 마냥 기다릴 수는 없어, 다시 차를 몰고 나와 전화 수신도 잘 되고, Tasman Valley가 잘 보이는 곳에서 나오는 차들만 뚫어지게 지켜보며 기다렸다. 오후 4시가 넘어 우리 일행이 일단 보트로 구출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도 2시간이 지난 저녁 6시 경찰차를 타고 오는 우리 일행을 만날 수 있었다. 구조비용을 지불하고 오느라 더 늦었다고 한다. 피로에 지친 얼굴들이지만 다시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일단 샤워부터 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Hermitage 호텔을 제외하고는 Cook Village내에 하나 밖에 없는 식당인 Old Mountain Café로 갔다. 마침 그곳에 오늘 구조작업을 진행했던 경찰과 DOC 직원 몇 명도 와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그들에게 감사의 뜻으로 맥주 한잔씩을 대접했다. 우리의 비어 있는 속은 큰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맥주를 몇 잔 마시고, 피자까지 먹고 나서야 겨우 배가 차옴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서야 정말 그 길고도 험난한 등반이 모두 끝났구나 안심을 하며, 아찔했던 순간들을 회상하며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말 평생 잊지 못할 등반이었다. 녹슬지 않은 백전노장의 탁월한 리더쉽으로 이끌어주신 비오님, 경험이 없는 상태로 왔지만, 극한 산악 등반의 상황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끝까지 잘 따라와준 나뭇잎, 위기 상황에서 더 강해진 나를 발견한 버섯동자 – 이렇게 세 사람의 환상적인 조화가 이번 산행을 무사하게 끝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또 다른 멋진 등반을 꿈꾸며 산행기를 마무리 한다.
우리의 등반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뒤에서 끝까지 지켜보며 도와주고 기도해준 뉴질랜드 한인산악회 여러분들과 사랑하는 가족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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