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맑음 Plateau Hut -> Mt Dixon(3004 m)
5시에 일어나 6시에 출발하기로 했는데, 비오님이 4시 반에 일어나 출발을 재촉하신다. Mt Cook등반에서 중도에 하차 하신 아쉬움을 만회 하시려는 듯 의욕적으로 서두르신다. 현미 누룽지에 밥을 조금 넣고 끓여 아침으로 먹고 5시 40분 Hut을 나섰다. Mt Dixon을 향해 설원을 걷는 동안 부옇게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한다. 눈이 많이 녹아 발목 위까지 빠지니 앞에서 럿셀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Mt Dixon 바로 밑에 도착했을 때 해는 완전히 밝아 있었다. 등반 시작부분부터 암벽등반이라서 비오님이 선등을 하셨는데, 비브람을 신지 않고 일반 등산화를 신고 오신 것이 이런 경우는 아주 도움이 되었다.
오르는 동안 낙석이 수시로 떨어져 위험천만이었다. 암벽등반 구간은 비오님이 모두 선등을 해주시고, 빙벽 구간은 내가 선등을 하면서 올랐는데, 비오님은 이민 온 이후 10여 년 동안 등반을 해 오지 않으셨는데도 불구하고, 젊어서 한국의 산을 휩쓸고 다니시던 그 녹슬지 않은 실력으로 앞에서 어려운 암벽구간을 잘 리딩해 주시니 참으로 존경스러웠다. 3명이 자일 1동을 이용해서 교대로 확보를 보면서 오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가도가도 암벽 구간의 끝은 보이지 않고, 늦은 오후 시간으로 접어들면서 피로감이 몰려오고, 입에서는 단내가 난다. 점점 경사도는 급해지고, 빙벽 구간도 단단히 얼어있어 오르기가 만만하지 않았다.
나뭇잎 왈 ‘Mt Cook 등반은 Mt Dixon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네요.’라며 혀를 두르면서 오른다. 해는 지기 시작하고, 3명이 쪼그리고 앉을 공간도 없고 바위들은 모두 무너질 듯이 솟아 있는 길! 이러다가 정말 조난이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오로지 위로 올라가 우선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정상 바로 밑 암벽 구간이 끝나는 상단 2850미터 지점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30분, 천만다행히 겨우 3명이 쪼그리고 앉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았다. 큰 바위에 자일을 걸어 확보를 하고, 아래로는 천길 낭떠러지인 바위 틈에 기대어 앉아서 밤을 세울 준비를 한다. 가져온 행동식(삶은 계란2, 사과1, 당근1, 쵸코바1, 쏘시지1, 견과류1줌)은 이미 바닥이 났고, 물통의 물도 다 마시고, 눈으로 채워 넣어 반쯤 얼어 있는 것이 전부이다. 다행이 긴장감과 피로감 때문인지 배고픔은 크지 않다. 당일에 마치고 내려갈 것이라 예상했기에 옷도 입고 있는 것에, 비옷 자켓 하나를 더 걸치는 것으로 밤새 추위를 이겨야 했다. 다행히 비오님은 오리털 파카를 가져오셔서 우리 둘 보다는 덜 추웠을 것이다. 일기예보에서는 내일 비가 올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비라도 내리면 끔찍한 상황이 될 수 있다.
<벼랑 끝에서 비박을 준비하는 비오님>
비오님은 30분 동안 안전 귀환을 위한 기도에 몰입해 있다. 잠을 잘 수도 없어 지난날 산에 다니던 이야기도 하고, 산 노래도 부르며 마음을 달래고 있다가 무심히 쳐다본 하늘에는 그야말로 별천지 세상이 보인다. 무수히 많은 별과 은하수, 그리고 떨어지는 별똥별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떨어지는 별똥별에 소원을 빌어본다. ‘무사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밤 12시가 넘어가니 바람까지 분다. 원래 추위를 많이 타는 나뭇잎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고 있다. 일찍이 이런 비박 경험이 없는 나뭇잎에게는 오늘 밤이 지금까지의 생애에서 가장 춥고 긴 밤일 것이다. 새벽 3시경 Hut쪽에서 불빛이 반짝이며 신호를 보내는 듯하다. Hut에 있는 Tom 일행이 우리가 안전한지를 확인하는 신호인 것 같다. 우리도 랜턴으로 아직 살아 있음을 알려준다. 당일에 내려 올 것이라고 했던 우리 팀이 새벽이 되어도 산 꼭대기에 있는 것을 보고 Tom일행은 DOC에 긴박한 상황을 알렸을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알았지만, Tom 일행은 이날 새벽 Mt Cook 정상을 공격 하려고 일어났는데, 우리 팀 일행은 보이지 않고 Mt Dixon 정상에 불빛만 보여 긴급히 DOC에 연락하였더니,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진행상황을 알려달라는 무전을 받아서, 정상공격을 뒤로 미루고 우리를 계속 감시하고 있었다고 한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 같던 새벽이 밝아오기 시작할 무렵, 온 몸의 근육은 돌처럼 굳어 있고 발에는 감각이 없다. 하지만 가야 한다. 정상으로 이어지는 마지막 2-300미터 설 능을 올라야 하는데, 발에는 감각이 없어 한참을 움직여 겨우 출발 할 수 있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 있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은 정상 100미터를 남겨놓고 크레바스를 따라 우회전하면서 하산으로 접어들게 한다. 그나마 하산 코스는 우려와는 달리 암벽구간도 없고 설 사면을 따라 내려 가면 되니 다행이다.
하지만 지친 몸으로 하강을 하면서 내려가니 시간이 많이 걸린다. 설 사면을 다 내려와 하강을 위한 암벽 상단에 이른 시간이 오후 4시, 이제 300미터가 넘는 수직 암벽을 타고 하강을 해야 한다. 시작부터 오버행이다. 누군가 걸어 놓은 슬링 2개중 1개는 반쯤 끊어져 있어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비오님이 먼저 하강 해서 확보 지점을 만들고 뒤이어 나뭇잎, 내가 차례로 내려 간다. 확보지점이란 칼날같이 날카로운 암각에 슬링을 걸어 자일로 내려가는 것인데, 슬링의 두께는 고작 4mm, 보통의 암벽구간이었으면 염려 없이 내려갔겠지만, 60-70Kg의 하중을 싣고 내려가면 모서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운 암각에 걸린 슬링은 금방이라고 끊어질 것 같이 불안하기 짝이 없어 입술이 바짝 타고 손에는 땀이 나며, 입에서는 기도가 절로 나온다. ‘하느님 제발 살려주세요!’ 살아오면서 가장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3피치 정도 하강에서 나뭇잎이 내려가다가 큰 바위가 떨어졌는데, 비오님이 미리 피해서 있지 않았다면 큰 일이 날뻔했다. 또 비오님이 하강할 때 떨어진 바위가 자일을 치고 가는 바람에 자일이 일부 손상이 되어 더욱 불안한 하강이 되었다. 7-8피치를 하강하고 나서야 실오라기 같은 생사의 갈림길을 겨우 벗어나 설 사면에 발이 닿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생환의 기쁨에 3명은 얼싸안고 기뻐 소리질렀다. 설원을 지난 Hut에 도착한 시간이 저녁 8시, Hut을 떠난 지 무려 38시간 20분만의 귀환이다. 이틀 동안 우리의 생사고락을 지켜봤을 Tom 일행이 가장 반갑게 맞이해 준다. 우리를 보자 곧바로 DOC 오피스에 우리가 무사히 돌아왔음을 무전으로 알려준다. 기진 맥진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짐을 풀고 거울을 보니 고글을 쓴 자리 빼고는 얼굴은 검둥이가 다 되었다. 선임자로 가장 신경을 많이 쓰신 비오님은 하룻밤 사이에 10년은 늙어 보인다.
Hut에는 4명이 더 새로 들어와 있었는데 Aspring Guides팀에서 가이드 2명과 호주에서 온 등반객 2명이 헬기를 타고 들어 온 것이다. 호주에는 뉴질랜드처럼 다양한 산악지형이 없어서 많은 호주 산악인들이 이곳을 찾는 것 같다. 물을 조금씩 떠서 몸을 닦고 수프를 끓여 골아 붙은 속을 달래고, 밥을 해서 늦은 저녁을 먹는다. 지치고 피곤한 상태인데도 나뭇잎이 정성껏 야채와 소시지, 계란을 넣은 볶음과 미소 된장국을 끓여 준다. 정말 세상 어떤 만찬도 부럽지 않은 꿀맛 같은 식사다. 11시가 넘어 어젯밤 그렇게 그리웠던 따뜻한 침낭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온 몸이 눈 녹듯이 녹아 내리면서 꿈나라로 향한다.
< Mt Dixon의 등반 루트 >
2월 8일 맑음 휴식
7시30분 눈을 떴다. 아직 긴장감이 남아 있는지, 피곤한 상태인데도 일찍 눈이 떠진다. 원래 계획에 의하면 오늘 하산을 하여 Cook Village에서 1박을 하여야 하나, 예상치 않은 비박을 함에 따라 오늘 쉬고 내일 하산하기로 한다. Tom 일행은 오늘 새벽에 미루었던 Mt Cook 정상 공격에 나섰고, 내일 정상공격에 나설 Aspring Guides팀은 Linda Glacier 초입까지 정찰 및 적응훈련차 일찍 나가고 없어 우리 팀만이 한가로운 아침 시간을 보낸다. 새벽에 올라간 Guides 팀은 9시30분경 내려왔고, 정상 공격을 하는 Tom 일행은 Summit Rock구간을 통과하는 모습이 망원경에 잡힌다. 20대의 젊고 건강한 사람들이라서 우리가 갔을 때보다 진행속도가 상당히 빠르다. 낮 12시 Ice Cap 상단에 두 명의 모습이 보인 후 진척상황이 없다.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Ice Cap 상단 부분의 눈이 너무 많이 녹아 계속 진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하산했다고 한다. 오후에는 산행일지를 정리하면서 이번 산행을 다시 한번 되씹어 본다. 사실 시작부터 조금 무리한 도전이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 때 한국 산악계에서 선두자적인 산행을 하셨지만, 최근 10여 년 동안은 등반을 해 오지 않으셨고, 60대의 나이에 접어든 비오님과, 체력은 남들보다 뛰어나지만 전문 산악 등반 경험이 전혀 없는 나뭇잎, 히말라야 등반을 다녀온 지 10년이 지난 나, 이렇게 구성된 인적 자원으로 전문 산악 Guider 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뉴질랜드 최고봉 Mt Cook 에 도전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Mt. Dixon까지 비박을 하며 올랐으니, 정말 기대 이상의 엄청난 등반을 해 낸 것이다. 하지만 Mt. Dixon 등반은 훨씬 난이도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 높이만으로 Mt. Cook보다 쉬우리라는 자만이 자초한 고행길이였다. 그러나 살아서 돌아 왔기에 그 등반한 위대한 것이 되는 것이리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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