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31. 00:46


삼천사지(三川寺址)는 현재 있는 삼천사(三千寺)에서 계곡 상류 쪽 용출봉에서 증취봉까지의기슭에 위치한다. 삼천사지와 현재 있는 삼천사는 굳이 말하자면 관련이 없다고 할 수 있는데, 현재의 삼천사(三千寺)는 1970년대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마애불이 있는 위치에 중건하였다.


< 삼천사(三千寺) 경내에 있는 마애불 - 보물 657호 >


일전부터 용출봉, 용혈봉의 산세가 좋아서 접근로를 찾은 적이 있는데, 그러다 우연히 삼천사지를 만나게 되었다.

삼천사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나, 자료를 찾아보니 의외로 많은 조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최초의 탐방조사는 1963년에 이루어졌고, 1999년~2004년에 본격적인 조사를 거쳐 2005년~2007년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그외에도 1995년에는 불교잡지에 실릴 정도로 오래전부터 세간의 관심을 끈 절터였다.

발굴조사 결과 대형 석조(石槽)와 동종(銅鐘), 연화대좌(蓮花臺座), 석탑기단석(石塔基壇石), 석종형부도(石鐘形浮屠), 대지국사(大智國師) 법경(法鏡)의 비명(碑銘)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동종은 보물로 지정받아 현재 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최근 발간된 삼천사지 소개자료에 의하면 삼천사지는 총4구역으로 나뉜다. 그중 가장 큰 절터가 있던구역을 1구역으로 명명하고, (大智國師) 법경(法鏡)의비(碑)와 귀부(龜趺)가 있던 곳을 4구역으로 하였다. 2구역은 1구역의 하류에 위치하고, 3구역은 4구역의 하류에 위치한다.

삼천사에 대한 옛기록은 "고려사", "동국여지승람" 등에 언급되고 있다고 하는데, 그 기록에 의하면 한때 30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할 정도의 큰 규모였다고한다. 옛기록에 삼천사의 천자는 川으로 표기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대지국사의 비편에서도'川'로 표기되어 있음이 밝혀졌다. 18세기 이후의 기록에는 '千'자로 바뀌어 현재까지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한편 삼천사는 고려시대 법상종(法相宗)의 일맥이었는데, 대지국사 법경(1020년 왕사, 1034년 국사로 임명됨)이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법상종은 삼장법사로 알려진 당(唐)의 현장(玄裝)과 그 제자인 규기(窺基)에 의해 세워진 종파로서 법(다르마)의 상(相)을 연구한다는 점에서 법의 성(性)을 추구하는 화엄종 등과는 교리체계가 다르다. 특히 유식(唯識)으로 알려진 정교한 철학체계를 체계화, 완성했다는 점에서 인도불교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려시대 법상종을 연구한 자료에 따르면 고려시대의 법상종이 미륵사상을 계승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유식5부 논서의 저자로 알려진 미륵에 대한 신앙의 결과가 아닌가 싶다.

입수한 자료에 의거하여 1Km 이상 광범위하게 산재한 삼천사지를 돌아보기로 하였다.

우선 1구역에 위치한 원래 삼천사의 중심이 되는 절터를 오른다. 기단부의 석축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 연구자료를 보니 삼천사는 16세기 중반까지 법맥을 잇고 있다가 적어도 1745년 이전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축이 후대에 또 다시 개축되었는지는 명확치않다. 다만 절터의 규모가 상상외로 크다는 것이 느껴진다.




석축위로 오르니 절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건물이 었었음직한 널따란 절터가 나타난다. 그 위로 용출봉, 용혈봉, 증취봉이 3형제처럼 나란히 서있다.




가만히 앉아서 초봄의 풍광을 느껴본다. 언젠가 이곳에 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낯설면서도 낯익은 공간의 묘함이란...

아래쪽에 해당하는 2구역쪽으로 가보기로 하였다. 직접 가는 길이 없어서 풀숲과 바위 틈을 헤치고 전진한다.

좀 작은 규모의 석축이 여기저기 산재되어 있다. 이곳은 혹시 암자가 아니었을까.




조금 더 풀숲을 헤치고 진행하니 멀리 중간 규모의 석축이 보이고, 그 아래로 채석장인 것으로 추정하는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곳에 이른다.




돌이 잘린 곳을 보니 그리 오래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최근의 흔적인지도 모르겠다. 이 지역은 한 때 20여년 이상 군부대지역이었으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추정하기기 어렵다.

다시 1구역에 해당하는 큰 절터로 돌아왔다. 3, 4구역을 가기위해 지형을 살펴보았다. 초행길임에도 사람이 다닌 흔적이 희미하게 나마 남아 있어서 길을 찾는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3구역은 4구역 가는 중간에 위치하는데 작은 절터에 해당하는 석축이 보이고 그 위로도 무너져 내린 흔적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도 이미 발굴작업이 완료되었는지 정비한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접근로는 무성한 풀과 낙엽에 뒤덮여있다.

마지막 구역인 4구역으로 향한다. 4구역은 삼천사지 발굴의 핵심이 되는 곳이다. 3구역과 4구역 사이에는 조그만 능선이 있어서 능선 너머로 내려서니 중간 규모의 절터가 나타난다. 이곳 역시 이미 발굴이 끝났으며,기단부를 가지런히 정비까지 해놓았다. 그럼에도 석재 사이로 잡목들이 자라나서 폐사지의 황량함을 더 하게 만들었다.




절터를 돌아보니 길을 잃은 느낌이다. 여기는 과연 어디인가?

4구역은 다시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아래에위치한 절터와 위쪽에 있는 대지국사(大智國師) 탑비의 터가 그것이다.

폐사지에서 증취봉 쪽으로 조금 오르니 마침내 거대한 거북이와 만난다. 있는지도 몰랐던 이 거북이가 1천년을 버텨온 거북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가슴이 시려온다.

이 거북의 정확한 이름은 "대지국사비(大智國師碑) 귀부(龜趺)"이다. 비의 받침대가 되는 거북이다. 비는 사라져 파편만 남았지만,거북은 홀로 1천년을 살아남았다.

귀부의 조성시기는 11세기로 추정한다. 화강암 재질로서 크기는 높이(137.5Cm), 너비(240Cm), 길이(270Cm)이다. 몸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 모양이다. 연구자료를 보니 신라 하대 이후에 등장한 용두형 귀부라고 한다.

신라 하대 귀부의 특징을 정리해 보면 1) 입에 물고있는 여의주가 없음, 2) 거북의 등에 연잎 비슷한 조각선이 새겨짐, 3) 귀갑 안에 王자가 새겨짐, 4) 목과 다리에 용처럼 비늘이 조각된 것이라고 한다. (출처 : 정지희, "북한산 삼천사지 대지국사 귀부연구", 2009.)

이런 전문적인 설명은 굳이 필요없을 것이다. 산속에서 갑작스레 조우해 보아야만 아는 느낌은 그보다 더욱 직관적이다. 그래서 이런 직접적인 마주침은 소중하고도 오묘한 것이다.




쌓은 것은 무너지고

얻은 것은 사라지며

모인 것은 흩어진다.

三川의 범종은 바람소리로 화했고

三川의 川은 마른지 오래며

大智의 智는 바램조차 없다.

大智와의 천년기약 어느덧 다했다 해도

모든 중생이 부처 되고 나서야

나 龜趺는 바다로 향할지어니

돌미륵은 어느 때나 한소식 전해올까나.





호접몽(胡蝶夢) 같은 귀부몽(龜趺夢) 삼매에 빠져, 용출봉에서 증취봉까지의 삼천사지 답사는 이렇게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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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