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간히 엷은 눈이 내렸지만 눈이 내리는 줄도 몰랐다. 어쩐지 해가 없는 동안 눈이 내렸고 해가 뜨면 눈이 내리지 않았다. 이 눈은 함박눈도 쏟아지는 싸리 눈도 아니었지만 가슴을 설레게 했다. 쌓이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웠고 쏟아지진 않았지만 이 겨울의 모호함을 만끽하기엔 충분했다. 여린 눈발 속에 미소짓는 나를 보고 사람들이 웃었고 그런 사람들을 보고 내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구름 속의 태양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사라졌고 향로봉과 비봉은 알프스보다 히말라야의 눕체보다도 높아보였다. 그동안 알던 이 산 전체가 뒤바뀐듯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발밑의 눈이 얼음으로 녹아들었고 서서히 온 몸이 딱정벌레처럼 딱딱해져갔다. 마치 투구 옷을 입은 듯했다. 한발짝도 떼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한걸음도 나갈 수 없다고 되뇌었다. 한겨울 희미한 눈발은 내 밑의 온 산을 얼어붙게 했다. 수백만 눈송이가 눈송이 없음에 자리를 내준다 해도 한갓된 나그네 같은 눈송이는 딱정벌레의 옷처럼 두터워져갔다. 대지는 눈송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잊혀졌던 빙하의 지층이 되살아나 늘상처럼 비스듬한 걸음을 겨우 내딛게 했다. 쏟아지는 마른 눈 속에 습관처럼 떠오르는 글자를 새겨넣었다. 정말 어렵게 다시 조우한 그 여운같은 것. 한겨울이어야 되살아오는 그 되새김 같은 것을...
사평역(沙平驛)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히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 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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