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밝았다. 오랜만에 긴 정적 속에서 잠들었던 것 같다.
오전 6시에 일어나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지프와 트럭에 짐을 실었다. 우리가 타고 갈 차량은 짐을 실을 수 있는 웨건형 지프이다. 이슬라마바드에서 부터 같이 했던 러시아 산악인 부부와 또 동행하게 되었다.
여기서 함께 이동하는 현지인들은 주로 가이드와 요리사(쿡)이며 이들이 트레킹의 핵심 멤버이다. 대다수의 포터들은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해서 고용하게 된다.
오늘의 목적지는 아스꼴리(Askole)이다. 가는 도중 걷는 길은 없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한 길만도 아니다. 때로는 걷는 것만이 유일하게 편안을 주는 곳이있다. 해발 3000m에 있는 아스꼴리는 트레킹의 기점이며 스카르두로부터 150Km 정도 떨어져 있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스카르두에서 최대한 구할 것을 구한 후 쉬가(Shigar)강을 따라 이동한다. 길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있으나 조금 지나니 먼지 날리는 회색빛 흙길로 바뀌었다. 쉬가강은 말라서 물이 별로 없지만 폭이 무척 넓은 강이다. 그 부석부석한 강바닥에는 사막과도 같은 황량함이 뭍어난다.
이 긴긴 회색 길은 강을 만나면 잠시 동안 아지랑이의 푸른 빛이 일렁이다 사라져 간다.
오래된 옛 도시인 쉬가(Shigar)의 인근에서 차량이 멈춘다.
다시 사방의 산과 강과 길이 회색빛으로 가득 차 있는데 이곳만 푸르다. 푸른 색의 당연한 권리가 이곳에서만 주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의외성이 신선하다. 몇몇 사람이옆의 과수원으로 들어간다. 과수원은 1.5미터 높이로 돌을 쌓아서 길게 담장을 둘렀다. 과수원 안에는 살구가 많이 열려있는데 사람들은 잔뜩 따서 자루에 담는다. 당장 오늘 저녁부터는 모든 음식이 자급자족인지라 미리 확보해두는 것이다.
강과 길이 동쪽으로 굽이치며 흐르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브랄두(Braldu)강인데 상류로 갈수록 강폭이 좁아지고 있고, 또 다시 아지랑이 처럼 일렁거리는 푸른 빛이 서서히 사라지다 나타나다를 반복한다. 대지의 타고난 건조함으로 인해 굽이치는 산과 구릉은 형편없이 구멍이 뻥뻥 나있다. 이런 길은 산사태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길은 점점 좁아지며 절벽을 깎아 만든 내리막 길을 아슬아슬하게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면서 내려온다. 저 아래 멀리 보이는 강바닥과 벼랑의 경사로 인해 고도감이 대단하다. 차 속에 있는 우리도 불안한데 차 지붕 위에 탄 사람들의 고도감과 불안감은 대단할 것이다.
출발한지 5시간 정도 지나 도착한 조그만 마을에 있는 K2 인(Inn)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점심을 먹고 나니 소풍가는 것 같은 들뜸이 있다. 차로만 갈 수 있는 낭만의 어드벤쳐이다. 짐은 차가 지고 가고 우리는 타고만 있으면 될 뿐이니 모두가 즐거워 한다. 그것도 잠시 다시 위험구간이 나타난다.
이전에 아스꼴리로 향했던 원정대의 기록들을 보면 아스꼴리까지 길이 나있지 않아서 중간 어느 기점에서부터 포터들이 짐을 지고 갔다는 기록이 있다. 또 후대의 어떤 기록에서는 길은 나있지만 산사태로 인해 쇠줄을 타고 강을건너는 것도 등장한다.
차량이 통과할 수 있는 다리가 세워진 것도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며 예전에는 강 건너 길을 이용하였는데, 산사태와 낙석의 위험이 커서 이쪽 편으로 다시 길을 냈다고도 한다.
좁은 길은 혹은 강 위로, 혹은 절벽을 내리누르며, 강과 절벽 사이로 끝없이 촘촘히 연결되어있다. 사람이 가끔은 위대해 보이는 순간이다.
조그만 다리를 조심조심 건너 오후 1시반경 저 멀리 아스꼴리가 보이는 곳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거의 도착한 것도 몰랐었는데 가이드와 기사가 갑자기 차를 세우더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그들은 이 험한 길을 무사히 온 것을 자축하는 모양이다. 우리도 모르게 저절로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 멀리 보이는 아스꼴리 계곡 >
< 가이드 익바르와 터프한 운전 기사 >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텐트를 치고 짐을 정리하였다. 우리 주변으로 현지 포터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 있다. 익바르는 이들 중에서 우리 짐을 지고 갈 포터를 고르기 시작하였다. 약 12명 정도의 포터를 고용하였다.
포터의 수는 대략 이렇게 정해진다. 우리 짐(텐트+식량+연료등)을 매고 갈 포터 6~7명과 그들 포터들의 짐과 식량을 지고 갈 포터의 포터 3~4명이 추가되는 식으로 정해지는 것이다.
야영지 뒤 쪽의 한구석에는 돌담을 쌓아놓았는데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다. 밀가루 구운 음식인 난을 화덕에 굽고 있는 것이다. 가이드, 포터의 주식이 바로 이 구운 난이기도 하다.
익바르는 처음 계약할 때부터 가이드 및 주방장 역할을 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는 한국팀을 가이드 한 적이 없기 때문에밥하는 법과 찌개 끓이는 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 식당 텐트 >
< 아스꼴리의 야영지 >
국립공원 야영금지 이후 정말로 오랜만에 해보는 야영이다.
대략 짐정리를 마친 후에, K2 BC를 다녀온 외국 트레킹팀이 야영준비를 하고 있기에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새까맣게 그을리고 얼굴 군데군데가 벗겨진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하였고 K2 트레킹에 대해서는 베리 터프(very tough)하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새로이 출발하는 우리를 안쓰럽게 보고 있는 듯했다.
비록 가이드와 포터가 우리와 함께 하지만, 편도 60Km가 넘는 발토로 빙하가 저 멀리서 우리가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다.
아스꼴리는 트레킹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상념이 무한하게 펼쳐질 자신만의 세계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또 다른 시공간의 틈을 이용하여 어떤 계기들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공산님은 극한을 경험하는 산악인들을 취재하려 할 것이고 또한 구상하고 있는 소설의 밑그림을 완성하려 할 것이다. 요사니도 오랫동안 자신의 열린 길과 세계를, 그리고 K2를 꿈꿔 왔을 것이다. 세상사 돌아가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진 그는, 텐트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 우리들 뒷편 넓은 터밭으로 어느 순간 사라져갔다.
< 아스꼴리의 무지개 by yosanee >
아마도 거기서 요사니는 다른 이들은 못 본 무지개를 보았을 것이다.
상념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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