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재회[會者] 

덜커덩 하는 큰 진동과 함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안전벨트의 압박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려선 텅 빈 활주로 위의 대기는 후덥지근하였다. 매캐한 비행기 매연 사이로 남국(南國)의 냄새가 느껴졌다. 열대 정글의 냄새이다. 축축하고 눅눅한 기운에 호흡마저 가빠졌다. 그 텁텁한 느낌이 온몸으로 감싸드는 것이 이미 멀리 떠나와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몇 시간 전 서울의 차갑고 무거운 공기와는 극히 대조적이었다. 너무도 다른 분위기에 심호흡을 해보았다. 몇 번의 큰 숨 끝에 더운 공기가 달게 느껴졌다.

사람들이 빠지면서 활주로는 차츰 어두워져갔다. 동쪽 편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을 사원(寺院)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 몇 년 만의 만남이었다.

사원은 나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나는 이 재회를 손꼽아 기다려왔다. 늘 같은 곳에 머물러있는 그들에 비해 나는 자유로웠으나 그만큼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다.

먼 하늘 아래 위치한 사원의 정적이 나의 전신을 압박하는 것 같았다. 열대정글에 맹수처럼 숨죽여 있는 오래된 사원을 본능처럼 느낄 수 있었다.

밤이 그렇게 지나가고 재회의 순간이 다가왔다. 예전처럼 무지하진 않았기에 다시 만날 기쁨으로 조금 들떠 있었다. 숲 너머, 해자 너머로 조금씩 모습이 보이자 오랜 친구를 만나듯 가슴이 뛰어왔다.

오래된 미래를 상징하는 그들은 변함없이 그렇게 우뚝 서있었고, 오랜만의 재회에 들떠진 나는 긴 해자(垓子)를 건너 사원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갔다.

 

at Angkor(앙코르)

 

II. 형체(形體) 

만물은 돌로 이루어져있다. - 돌레스(Dolles) 

웅장한 도시의 화려한 사원은 돌로 채워져 갔다.

처음엔 돌 하나가 시작이었다. 돌 위에 돌이 올라갔다. 돌 옆으로도 돌의 행진이 계속되었다.

수백만의 돌이 늪을 메꾸어갔다. 돌 위로, 앞뒤로 또 다시 돌들이 쌓였다.

그러나 앞에선 돌과 뒤에선 돌들 간엔 차별이 있었다. 뒤에 놓인 돌은 영원한 침묵으로 잠들었고, 앞선 돌들은 왕으로, 뱀으로, 병사로, 압사라로, 코끼리로 새롭게 창조되었다.

어느 돌들은 새겨지는 순간 신성한 하늘이 되었고 또한 새겨지는 순간 지옥이 되었다.

같은 편이 되기도 했고, 적이 되기도 했다.

신화가 다시 재연(再演)되었고 왕국의 부활이 약속되었다. 천년왕국의 영원한 번영의 꿈은 그렇게 욕망되었다. 욕망은 다시 사원을 만들었고 사원은 다시 욕망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산과 바다가 만들어졌다. 사원은 점점 수미산(須彌山)을 닮아갔다.

비슈누 신의 아바타로 다시 태어난 왕은 이미 수미산이 되어버린 사원에 거주하였다.

그리하여 돌덩어리의 대지 위에 신이 지배하는 하나의 거대한 우주의 형체(形體)가 갖추어졌다.

 

at Angkor Wat(앙코르와트)

 

III. 독백(獨白)

모든 욕망은 타자(他者)의 욕망이다. - 라깡(Lacan)

            순간의 그대를 기다리려 이 길고도 지난한 세월을 버텨왔음을 알아주었으면 하오.

이제야 비로소 긴긴 기다림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것 역시 단지 우리의 이기적인 바램이 아니라는 것도 포함해서 말이오.

우리의 바램은 이곳 밀림에서 처음처럼 하나의 돌덩어리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뿐이라오.

우리를 끌어내리려는 대지의 무게를 버티려 우리는 형체를 이루었을 뿐이었소.

그간 버텨왔던 오랜 풍상(風霜)의 시간에 어찌 회한이 없겠으리오만, 이제 우리는 우리의 형체를 포기할 것이오. 비로소 우리는 자유로워질지도 모르겠소.

형체의 속박조차 사라진 우리가 조각 조각난 돌무더기로 쌓여있음을 슳어하는 대신 우리가 애써왔던 욕망의 세월을 비웃어주길 바라오.

우리를 만든 이들이, 우리를 욕망했던 이들이 어느덧 사라져갔음을, 우리 또한 그렇게 화(化)할 것임을 일깨워주길 바라오.

대지위로 우뚝 솟은 사원의 모습이면 어떻고, 대지위에 편히 누운 또 다른 모습은 또 어떠리오.

이제 모든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로워진 돌덩어리로 재탄생함을 축원해주기 바라오.

하나의 돌로 태어나서, 이 영욕(榮辱)의 천년왕국의 땅을누린 후 또 다른 하나의 돌로 되돌아감을 말이오. 

at Phimeanakas(피메아나카스)


IV. 해체(解體)

돌은 무상(無常)하다. -돌리스(Dol-less)

웅장한 도시의 화려했던 사원들도 금이 가고 무너졌다.

욕망하는 자들이 사라진 세상은 차츰 숲으로 덮여갔다.

홀로 남겨진 사원은 이제 꿈꾸지도 욕망하지도 않았다.

기나긴 집착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했다.

푸른색의 생명이 사원의 모든 것을 뚫고 한 뼘씩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돌덩이는 자신의 몸체를 푸른 생명이 뚫고 지나 대지와 만날 수 있도록 묵인하였다.

나무는 직선으로 뻗어 솟아났고 돌덩어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아래로 향했다.

수많은 돌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

이 오래된 사원은 더 이상 외면의 형체에 의미를 두지 않았고 내면의 외침에 귀 기울였다.
그리하여 차츰 무상(無常)의 이치를 깨달아 갔다.

그만큼 사원은 조금씩 낮아져갔다.

어느덧 돌과 나무는 하나로 합쳐져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돌은 나이테를 가지게 되었고 나무는 화석처럼 굳어져 돌이 되었다. 

천년왕국의 영원한 번영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또 다른 욕망이 새롭게 사원을 만들어 가겠지만 사원은 더 이상 꿈꾸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간절한 욕망이란 것이 단지 순간의 집착일 뿐이라는 오래된 비밀을 풀어버렸기에, 또한 수많은 돌들의 진정한 염원이 어떤 것인지 이미 알아 버렸기에... 

at Ta Prohm(따프롬)

 

V. 일몰[定離]

저녁바람이 불어오더니 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산마루에 걸린 그림자들이 더욱 길어지며 세상이 짙푸른색으로 변해갔다. 태양은 반대쪽에서 거꾸로 저물어가지만 야속하게도 늦은 우리를 기다리지 않았다. 나무사이로 언뜻 비치는 하늘 저 멀리 구름조차 붉어지기 시작했다.

가파르고 거친 계단을 오르느라 숨은 헐떡였지만 산꼭대기의 사람들 사이로 서둘러 스며들어갔다.

습기를 먹은 대기는 푸른 밀림을 검녹색과 짙은 남색으로 버무려 놓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태양은 그들을 잠식하였다. 더 이상 그전의 색깔들이 제빛을 내지 못하게 붉게 타들어갔다.

붉은 향연은 저 멀리 솟아있는 푸른 생명 대신 앙코르 유적의 빛바랜 돌을 더욱 붉게 물들였다.

밀림은 붉게 타다 제 스스로 지쳐 어두워져 갔고 하늘은 터질듯이 붉어졌다.

지평선 밑으로 해가 사라져 가는 만큼 더욱 짙게 물들었다. 꿈처럼 환영처럼 멀리멀리 번져나갔다.

또 다른 하루가 저물어 갔지만, 가파른 계단 유적위에서 모든 이들은 오래오래 그 자취를 담아냈다.

사방의 아우성 속에서도 사람들은 조용히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더 이상 말이 없어졌다.

어느 것도 이 침묵의 광경을 방해할 수 없었다.

세상이 붉어질수록 번뇌는 사라져갔고 수많은 순간의 일부를 맛보았다. 순간과 순간이 교차되는 짧은 시간동안이나마 없어짐(無常)의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지혜를 얻은 것 같았고 자유롭게 쉬고 싶어졌다.

천년의 유적을 제 둥지로 삼은 새들 역시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유적 너머로 빛나는 붉은 원의 향연이 무한히 커지더니 열대밀림과 그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조용히 그리고 포근히 감싸 안으며 서서히 사라져갔다.

at Phnom Bakeng(프놈바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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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