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8시까지 늦잠을 잔다. 어젯밤에 랄과 오늘 일정을 상의해 보니 피상까지 가는 길이 그리 멀지 않아서다. 이틀동안 강행군으로 인해 피곤이 쌓였는데 그나마 좀 풀린다.

9시 조금 넘어 차메에서 출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강 건너 높은 절벽아래로 예쁜 마을이 나타난다. 옥빛 강위로 걸쳐진긴다리를 건너야 한다.

 

 

 

강을 건너면 안나푸르나 연봉이 잘 보일 것 같았는데 역시나 다리건너 예쁜 마을로 들어서니 설산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앞으로펼쳐지는 피상가는 길은 너무나 아름답다.

매일 매일전혀 다른 모습을 펼쳐 보여주는 대자연과 인간이 살아가기 위하여 자연스레 그러나 억척스레 개척한 길들은 자연과 문명의 조화를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다.


해발약 2800미터인 이 지역은 사방이 전나무숲으로 쌓여있다.숲이 바뀌면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 생겨난다. 전나무는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고 안나푸르나 2봉(7937m)이 배경으로 서있다. 고도차 5000미터가 넘는 어마어마한 설산이 앞에 솟아있는 것이다.

설산 밑으로 시선을 옮기니 전나무숲은 깊은 계곡 건너편으로도 끝도 없이 이어져 있다.

 

 

전나무 숲 덕택인지 하늘은 더욱 맑고 산은 가깝고 아주 크게 보인다. 몇몇 구름이 홀연히 없어졌다 생겼다 하며 안나푸르나 연봉의 모습을 가려주기도 한다.

 

 

"청산은 원래부터 요동이 없는데 흰구름만이 떠서 오락가락할 뿐이다." - 영운선사

 


 

몇일전에 황금빛으로 빛나는추수 직전의 들판 옆길을 걷던 가이드 랄은 배경을 바꾸어 또 다시 십여미터 앞에서 전나무 숲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설산을 향하여 들어가고 있다. 나는 그 뒤를 황홀감에 빠진채 감격하며 걷고있다.

전나무 숲이 차츰 사라지면서 계곡쪽으로 시야가 넓어진다. 그러나 길 우측으로 뻗어오던 능선이 갑자기 절벽이 되어서 길을 막고있다. 그러나 절벽을 깎아 만든 좁은 길이 아슬아슬하게 트여있음을 앞서가는 당나귀로 인해 짐작한다.

 

 

절벽 옆을 깎아서 만든 길은 아스라히 걸쳐져 있고, 그 길에서 당나귀는 자기의 임무를 다 할뿐이다.

 



 

안나푸르나 지역에서는 당나귀를 이용하여 짐을 많이 나르는데, 말보다는 빠르지 않지만 위험하지 않고 인내심이 뛰어나다고 한다. 프랑스 속담에 "참을성은 당나귀의 미덕이다.(Patience is the virtue of asses.)" 만 보더라도 당나귀의 인내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나귀와 관련된 여러 속담과 우화가있는데그다지좋지 않은 상황을 희화화하는 것이 많다.

"당나귀가 여행을 떠났다고해서 말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이런 식이다.

당나귀와 말이 등장하는 아주 유명한 선문답이 있다. 당나라의 선승이신 영운선사(靈雲禪師)가 선문답에서 남긴화두(話頭)이다. 경허선사께서 이 화두로서 깨달음을 위한용맹정진을 하셨다고 해서 더욱 유명하다.

 

"불법의 뜻(대의)"을 묻는 객승에 영운선사는 다음과 같이 답을 한다.

 

驢事未去 馬事到來(여사미거 마사도래)

"나귀의 일이 다 끝나기도 전에 말의 일이 닥쳐왔도다."

 

화두를 임의로 해석할 수는 없지만, 인생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일이 함축되어 있는 듯 싶다.

자기의 선택과 상관없이 벌어지는 더 큰 일들은 현재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작은 일들을 아주 우습게 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구름이 조금씩 몰려온다.

절벽길을 통과한 후 커다란 능선 덩어리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 길은 그 덩어리를 피하여 좌측으로 급격히 꺾어진다. 이 바위 덩어리는 마치 울산바위처럼 하나로 이루어진 것 같다. 근데 ㄱ자 모양의 덩어리로서 길이만 해도 1Km를 넘는 것 같다. 작은 능선덩어리 처럼 보이지만 구름으로 둘러쌓여 있는 정말로 특이한 지형이다.

한참을 걸려서 통과하면서 그 규모와 신기함에 놀란다.

 

 

한참을 걷다가 늦은 점심으로 달밧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선다. 뒤를 돌아보니이 대단한 바위능선은 아직도 위풍당당하게 구름속에 잠겨있다.

 


 

마르샹디 강이 급격히 좁아지면서 저 멀리 능선위로 성채같은 것이 보인다. 윗마을 피상이 보이는 것이다.

피상은 두개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윗마을 피상(Upper Pisang)과 아랫마을 피상(Lower Pisang)인데, 당연히 윗마을이 먼저 생긴후 트레커들을 위하여 아랫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일단의 트레커들이 앞서 가고 있고, 윗마을 피상이 점점 다가온다. 가까이 갈수록 우리나라 달동네처럼 생겨 보인다. 그러나 중세풍의 고풍스러운 느낌이 나기도 한다.

 


 

윗마을 피상 뒤에 있는피상피크(Pisang Peak, 6091m)는 역시나 구름에 가려서 진면목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랫마을에서 30분이상 걸리는 윗마을에서는 안나푸르나 2봉이 아주 잘 보인다고 한다. 어차피 내일의 코스가 안나푸르나 2봉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갸루(Ghyaru)를 통하여 가는 길이므로 윗마을 방문은 생략하기로 하였다.

 

< 중세풍의 멋진달동네 - Upper Pisang >

 

3시반경 멋진 풍경속에서 아랫마을 피상의 숙소에 도착하였다.2층 옥상으로 올라가서 트레킹을 정리하고 저녁을 주문하였다.

 



 

그 와중에 구름은 조화를 부리면서 잠시나마 안나푸르나 2봉을 희미하게 보여준다.

 

산은 원래부터 요동이 없는데 흰구름만이 떠서 오락가락할 뿐이라고 했지만 세속의 관점에서 보면 구름과 설산은 상호보완적이 아닌가 싶다.구름이 있을 때 산은 더 높고 커 보인다. 반대로 구름이 없을 때 산은 작고 낮아 보인다. 어떤 때는 왠지 초라해 보이기도 한다.

 

적당히 가려주고, 적당히 높혀 보이려는 세상에서 봐서그런가 보다.

구름이 있을때는 구름이 없어지길 바라지만 반대로구름이 없을 때는 구름이 좀 걸쳐주길 바란다. 이 갈등형의 인간상이여...

늦은 밤, 자다가 꿈에서 깨어난다.

아버지께선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로 푸른색의 뱀을 날리고 계셨다.

 

밤새 뒤척거리다 억지로 남은 잠을 청하였다.

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