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 B. 파스칼
오늘의 목적지는 호불체(Khoburtse, 3930m)이다.
호불체는 발토르 빙하지대에 위치하며, 빠유에서 10킬로 정도 떨어져 있으며 빠유와 고도차는 500미터이다.
보통 고소적응을 위해서 하루에 고도차 500미터를 넘지 말도록 권유하고 있다.
빠유를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가 빙하지대임을 보여주는 거대한 단절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곳은 면면히 흘러오던 강의 흐름이 끊어지는 곳이며, 채석장을 방불케하는 작고도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쌓여있는 곳이다.
그 너머로는 울리 비아호(Uli Biaho, 6417m)와 트랑고 타워(Trango Tower, 6286m)등이 빛나고 있다.
빠유를 출발한 수많은 트레킹팀과 포터들이 줄을 지어 행렬을 하고 있다. 그동안 보이지 않던 빠유피크(6610m)의 정상부가 보이기 시작한다.
< 빠유 피크 >
이곳은 강과 빙하의 경계지대이다. 비아호(Biaho)강은 여기서 부터 자신의 고유한 이름을 부여받아 흐르고 흘러 인더스강이 되며, 발토로빙하는 거꾸로 산을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
발토로 빙하는 길이가 62Km에 달하는 지구 상에서 몇 안되는 긴 빙하이다.
빙하라고 해서 눈과 얼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빙하는 흐르면서 수없이 산기슭을 깎아내어 자신의 나신을 돌무더기 속으로 감춘다. 빙하위에 얹힌 돌덩어리는 억만년의 풍화를 겪으며 큰 덩어리가 작은 돌덩어리로 또한 잔돌로, 흙으로 화하는 것이다.
저 멀리 검게 빛나는 암반 아래로 큰 동굴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검게 빛나는 암반은 실제로 빙하의 얼음덩어리이며 그 아래로 직경 수십미터의 동굴이 입을 벌리고 있다. 놀랍게도 동굴 안으로부터 엄청난 양의 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주변을 깎아 움푹 파이게 하지만, 빙하는 자신의 깊숙한 속을 깎아내어 자신의 또 다른 분신에게 길을 내어주는 것이다.
검은 얼음 동굴은 신화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자궁, 블랙홀, 무시(無始)이래의 흐름, 태초와 연결되는 시간의 통로...
영겁의 세월을 화석으로 살아온 얼음은 하류로 흐르고 흘러 이곳에서 비로소 자유로이 풀려난다.
그 긴 세월이 해체되어 순환의 고리를 보여주는 이 곳이야 말로 시공의 무한한 비밀을 보여주는 곳이다.
< 빙하의 얼음동굴 >
얼음의 해체는 곧 자신의 흐름이다. 자기를 스스로 옭매던 결정체(watermark)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자신의 관성에서 벗어난다. 그 결과 자신의 주변까지도 소통하게 한다.
이제 이들은 인더스 강이 되어 바다로 나갈 것이며 언젠가는 또 다시 여기로 와 그동안의 자유를 만끽한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발토로 빙하를 오르내리는 고단한 포터 역시 자연의 그 순환에 동참한다. 다만 그 순환이 빠를 뿐이다.
이곳을 찾는 객들도 양태만 다를 뿐 그 흐름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빙하지대로 들어섰다.
그나마 수많은 앞선 발자국들이 여기가 길이라는 것을 알려줄 뿐 거대한 돌무더기의 세계이다.
이곳은 사막과도 같다. 더 이상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이 색다른 공간의 절대적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
멀리 앞서가는 이들의 모습에서, 두런두런 앉아 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낀다.
이곳에선 타자의 모습이 곧 나의 실존이다.
속에 또 다시 동일한 물음이 생겨난다. 지금 여기 왜 있는걸까.
아침에 출발했던 빠유피크와 스쳐 지나온 트랑고타워가 이제 멀리 보인다. 눈앞에는 단아한 모습의 캐세드럴 타워(Cathedral Tower)가 펼쳐져 있다.
< 캐세드럴 타워 - by yosanee>
캐세드럴 타워 옆쪽으로 롭상 스파이어(Lobsang Spire, 5707m)가 보인다.
< 캐세드럴 타워 &롭상 스파이어- by yosanee>
멀리 빙하의 돌무더기 넘어 오늘의 야영지인 호불체가 보인다. 빠유를 출발한지 약 6시간이 지났다.
멀리서 보니 거대한 산 밑에 위치한 야영지의 텐트들은 황량한 사막에 핀 꽃과도 같다.
야영지의 텐트촌 사이로 실개천이 흐르고 있다. 빙하가 녹은 물이라서 음용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 실개천은 바로 뒷산의 빙하가 녹은 물인데 재밌게도 밤에는 빙하가 얼어붙으므로 밤늦게부터는 물이 흐르지 않는다. 친환경적 최신 급수 시스템이라고나 할까.
가이드 익바르는 살인적인 더위 속에 빙하의 너덜 길을 걷느라 녹초가 된 우리에게 오렌지 분말쥬스를 타주었다.
지친 몸을 추스린 후 야영지 주변의 높은 능선을 탐사하였다.
호불체 아니이 삭막한 빙하지대를 빛내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 가녀린 생명체는 스스로의 힘으로 피어나서 자신의 존재를 절대 부정하는 그 황량함조차 값지게 한다.
<The Beings... by yosanee>
싹은
모든 것들을 위해 서있네,
심지어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을 위해서도,
내면으로부터, 스스로 축복하는, 모든 꽃들을 위해서;
그렇지만 때때로 필요하다네,
그것의 고귀함을 다시 일깨워 주는 일이......
- G. Kinn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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