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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9.08 사이쉬초 - 내려가기 14


천천히 빙하를 마주보고 고도를 낮추어 랜딩을 시도한다.


발과 무릎의 고통만 아니라면 빙하 위로 내가 탄 비행기가 착륙하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오전 5시경 문힐캠프를 출발하여 곤도고로 빙하를 밟은 시점은 오전 11시.

빙하에서 곤도고로 패스를 올려다 본다. 구름에 가려진 곤도고로 패스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다.

뭔가 툭 떨어져나가는 느낌이다. 가슴 한편이 시원하다.


저 멀리 빙하 뒤로 빙하라기 보기엔 폭이 작은 몇 개의 빛줄기와 신기루처럼 보이는 푸른색이 있는 곳이 오늘의 목표이다.

후스팡(Xhuspan, 4680m)으로 불리는 곳이다.

자연은 빙하와 모레인지대를 잘 버무려 길이 통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잠시 한눈 파는 사이 사람의 모습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저 멀리 희미한 동선으로 나타난다.







높은 지형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지형으로 내려가는 길이 이색적이다.

자그만 빙하호와 모레인 호수도 군데 군데 볼 수 있다.

빙하 위를 1시간 정도 걸었을까 갑작스럽게 주변을 둘러싼 색이 달라지고 있다.

잿빛과 회색빛으로 이루어진 검은 대지위로 푸른빛이 띠처럼 다가와 모든 주변을 감싼다.

빠유 이후 마침내 열흘 만에 생명의 색인 푸른색을 만난 것이다.

여지없이 야생화의 군락도 여기저기 펼쳐져있다. 멀리 신기루처럼 보이던 것은 실재하는 오아시스였던 것이다.

사라져버린 후에야 그 소중함을 알아버린, 그 기쁨의 재회로 가슴이 뭉클해진다.






녹색의 초원 한편에 빙하 녹은 물이 조그만 강을 이루어 흐르고 있다.

그 옆으로는 거대한 빙하가 도도히 흘러가며 언제라도 이 고요한 생명의 땅을 덮칠 것만 같다.

오후 1시 후스팡에 도착하였다. 가이드 북에 의하면 후스팡(Xhuspang)은 xhu(터키석 색 꽃의) + spang(초원),

즉 터키석 색인 푸른 색의 꽃이 가득찬 초원이라는 뜻이다.







조그만 강 건너의 모래사장에는 트레킹팀과 원정대의 텐트가 몇 동 쳐있는 것이 보인다.

돌로 된 집 뒤에서 익바르가 나타나더니 여기서 점심을 먹는다고 한다.

오늘의 일정이 끝나는가 했더니 그게 아니다. 여기서는 점심만 먹고 바로 내려간다고 한다.

익바르는 키친텐트와 식기 등을 모두 콩코르디아의 다른 팀에 넘기고 음식물 일부와 우리가 야영할 텐트만 가지고 곤도로고 패스를 넘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는 다른 팀의 버너와 그릇을 빌려서 점심을 해결하였다.

이제 여기서 자고싶어도 잘 수도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우리 일행이 3명의 소수인데다, 고소증도 없고 체력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여 결정한 익바르의 배수진이었던 것이다. 체력적으로부담이 되긴했지만 나를 포함해서 다들 내려가는 것을 반기는 분위기다. 산에 들어온지 어느덧 12일째니 여러모로 슬슬 지겹고 힘들때도 된 것이다.


모두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우리만 모르던 오늘의 목적지가 사이쉬초(Shaishcho, 3330m)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사이쉬초는 후스팡에서 16Km 정도떨어진 곳이며 1400미터의 고도를 더 내려가야한다.

라일라(Laila, 6200m)의 정상부는 구름에 가려 볼 수가 없지만 라일라로부터 흘러 내리는 빙하는 압권이다.

짙은 회색의 빙하가 바로 쏟아질 듯하다.




라일라를 지나면서 곤도고로 빙하의 경사가 급해지면서 생긴 모레인을 넘는다.

모레인 지대에 몇 개의 텐트가 보이는데 라일라를 등정하기 위해 온 것이다.

모레인과 빙하의 경계에서는 조금만 방심해도 길이 사라진다.

앞에 사람이 빤히 보이는데도 앞 사람의 발자국을 놓치게 되면 쉽게 만나지를 못한다.






기세등등하던 곤도고로 빙하는 마셔브롬(7821m)의 등줄기를 만나면서 급격하게 좌측으로 꺾여 동남쪽으로 흐른다.

마셔브롬의 남동면에서 흘러내리는 빙하와 합수하게 되는 것이다.

마셔브롬 남동면의 빙하 우측 옆으로는 마셔브롬패스가 있어서 발토로 빙하쪽으로 넘어갈 수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위험해서 원정대도 이 쪽으로는 거의 안다닌다고 한다.





마셔브롬의 남동면의 급사면에서 쏟아져 내리는 빙하의 위용이 대단하다.

바로 맞은편 구릉의풀밭 전망대에서 익바르로부터 마셔브롬 패스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는다.

다른 포터는 물론 익바르 자신도 가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저 너머가 너무 궁금하여 한번 가보고 싶다는 것이다.

물론 갈 형편은 안되지만 말이다.




어느덧 오후 4시다. 우리도 빙하가 흐르는 방향인 남쪽으로 향한다.

왼쪽 산사면에서는 더 이상 빙하가 내려오지 않으나 우측으로는 곤도고로 빙하가 마셔브롬의 남동면 빙하와 합쳐져서 거대한 흐름으로 내려가고 있다. 빙하건너 마셔브롬의 남동 능선이 구름 속을 오가며 치솟아있다.






                                                    < 마셔브롬의 남동능선 - photo by yosanee >


빙하 옆의 모레인 지대와 좌측 사면에서 쏟아진 돌들의 너덜길이 연속된다.

갑자기 빙하의 폭이 좁아드는 협곡으로 접어들더니 왼쪽에 90도 절벽이 나타난다.

절벽에는 집채만한 바위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데 언제라도 떨어질 듯하다.

우측은 빙하의 협곡, 좌측은 낙석으로 이루어진 쉽지 않은 길이다. 최대한 빨리 통과하였다.


                                                         < 사이쉬초 가는 길 - photo by yosanee >



어느덧 햇살이 서쪽으로 많이 기울었다.

계곡이 갑자기 넓어지더니 부채꼴모양으로 퍼져나가는 편안한 길이 시작되었다.

이런 초행길은 내가 어디서 쉬어야 할지, 얼마나 더 가야할지를 알려주질 않는다. 앞으로의 행로에 대한 그러한 無知가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해준다. 모른다는 사실로 인해 불안해하지 않으며, 이 열린 세계와 그 위에 놓인 두 발에 나를 맡긴다.

빙하조차 말라 사라져가는 광활한 대지 위를, 어슴푸레 빛이 사라져 가는 동안 걷는다는 것은 삶에서 몇 번 오지 않는 기회일 것이다. 더구나 오래 길을 걷는 동안 쌓인 극도의 피로감과, 그 와중에 자신이 사라져버린 듯한 이 느낌은 그리 낯설진 않지만 그리 쉽게 오는 경험도 아니다.


어둑어둑한 가운데 끝이 없는 머나먼 길이 이어질 때, 세계가 내 몸을 통해 자신에게 던지는원초적 물음을 다시 한번 간직하게 된다. 대신 발토로 빙하를 거슬러 오를 때 떠오른 수많은 물음들과 상념의 장막이 내 주변을 맴돌다 기억 너머 저편으로 사라져갔다.

몸은 극도로 피곤하여 홀로 이 세계 속에 주저앉아 쉬고 싶었지만 머릿 속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고통스런 걸음의 행보가 생각 너머로 몸에 각인되어 갔다.

처음으로 생각이 저물어가는 빛처럼 가물거린 채로 걷고 있다. 마침내 상념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걸음만 남았다.





1시간 여의 야간 산행 끝에 저녁 8시경 사이쉬초(Shaishcho, 3330m)에 도착하였다.

문힐캠프로부터 곤도고로패스를 거치는 20Km가 넘는 거리를 오르내리는데 15시간이 걸린 것이다.

내일이면 트레킹의 종료지점인 후세(Hushe, 3050m)로 하산하게 된다.

길고 힘든 하루가 마무리 되어 좋기도 했지만, 그간 목표로 했던 모든 여정을 무사히 마친 것이 기뻤다.

또한 오랜만에 추위와 고소로부터 해방되어 푹 잘 수 있게 되는 것 또한 아주 맘에 들었다.

그러나 빨리 자야 했다. 곧 코고는 소리만이 온 세상을 두드릴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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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