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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31 곤도고로 패스 - 저산 너머 12


자다 깨다를 되풀이한다.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를 넘었는데도 세상은 조용하다.

오직 눈 오는 소리만 고요하고 깊은 침묵을 깨고 있다.


아직도 기다리던 원정대는 오지 않고 있다. 혹시 이 마른 눈 때문에 오지 않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잠결에서도 들었다. 시계를 보고 다시 깜빡 잠이 들었다. 4시 조금 지나서야 무전을 주고받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바르가 출발준비를 시킨다. 그래도 험한 길 가기 전에 아침을 챙겨주는 정성이 갸륵하다. 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텐트를 걷고 출발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둠속으로 적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더니 우리 곁을 스치며 지나간다. 우리도 허겁지겁 앞 팀을 따라간다. 새벽 5시 조금 넘은 시간이다. 원정대를 기다리다보니 시간이 지체 된 것이다.


아직 세상은 어두우며 빙하의 하얀 눈에 반사된 랜턴 빛이 이쪽 저쪽으로 산란된다.

늦었다는 생각 때문인지 모두 아무런 말 없이 와인(Vigne) 빙하를 건너고 있다. 앞 사람이 밟은 자리를 밟는데도 빙하의 눈 속으로 발이 푹푹 빠진다. 깊은 곳은 허벅지 이상 빠지기도 하였다. 와인빙하를 건너는 데만 1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 고도를 높히지도 않았는데 체력소모가 극심하다.


산으로 온통 둘러싸인 이곳은 해가 늦게 뜬다. 서서히 세상이 밝아온다.

와인빙하를 건너자마자 설사면이 치솟아있다.

앞에는 20여명의 사람들이 경사 50도 정도의 설사면을 개미처럼 오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저기를 어떻게 오를지 암담했지만 막상 설사면에 발을 들여놓으니 계단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경사가 아주급한 곳은 고정자일을 설치한 곳도 있다.


출발한지 1시간 반 정도가 지나니 참을 수 없을만큼 숨이 차다. 개미처럼 천천히 걸을 수 밖에 없다.

귀에서 심장 뛰는소리가 들린다. 그 단조롭고도 큰 울림에 놀란다.

서있는 것도힘드니 한발짝 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힘들다.

휴식을 빙자해서 잠시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는데 익바르가 갈길을 재촉을 한다.

해가 조금 더 떠오르면 빙벽이 붕괴될 수 있고, 반대 편에서는 낙석의 위험이 점점 커지기 때문이다.

잠시 뒤를 돌아 보니 조금전 올라온 와인빙하가 까마득히 멀리서 운무에 가려져 있다.

하늘은 그 일부만 검고도 푸른 빛을 보여주더니 조금씩 하얗게 바래간다.









30분 정도 더 오르니 정체지역이 나타났다.

여기가 가장 위험한 구간인 것이다. 10여 미터의 설벽이 수직으로 솟아있고 우측 바로 옆에는 크레바스의 입구가 커다랗게 드러나 있다.

앞선 사람들이 고정자일에 의지하여 올라가고 있다. 때마침 병목현상 구간이라서 그 핑계로 배낭을 벗어놓고 숨을 고른다.

꽤 높이 올라온 듯, 와인빙하는 이제 보이지 않고 앞뒤로 설산이 우뚝 솟아있다.

파란 하늘과 흰 운무가 교차되는 곳에 검은 산들이 말없이 서있다.







하얀 설벽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오른다.

밤새 가슴 졸이던 대상에 막상 부딪쳐보니 그다지 두렵지 않다. 두려움은 내 생각이 만들어낸 가상공간 속에서만 더욱 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설벽을 오르는 잠시 동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냥 나의 가쁜 호흡이 고단한 발을 들어올리는 조심스런 몰입만 있을 뿐이다.





설벽 위에는 레스큐(Rescue)팀 대장이 우리가 의지하고 올라온 자일을 피켈로 고정하면서 앉아있다.

그는 씨익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우리는 그 자일이 다른 확보물 없이 단지 대장의 피켈에 형식적으로만

얽혀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만약 누군가 미끄러진다면 줄줄이 빙하의 크레바스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가장 위험한 구간을 오르니 경사가 조금 완만해진다.

그러나 멀리 앞 쪽에 오버행의 빙벽이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이 보인다.

길은 빙벽을 쭉 따라 올라가서 좌측의 안부로 이어지고 있다. 아마도 이 구간에서 빙벽이 허물어질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여기서부터 곤도고로패스의 정상부까지는 아주 긴 고정자일이 설치되어 있다.







마침내 곤도고로패스의 정상부에 도착하였다.

지도에는 5940미터로 표기되어 있으나 실제높이는 5650미터라고 한다. 고도계를 보니 5770미터로 나타난다.

고도차가 500미터인 문힐캠프로부터 3시간 30분 정도가 걸렸다.

정상부에서의 장대한 히말라야의 파노라마를 기대했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K2, 브로드피크, 가셔브롬, 마셔브롬 등을 볼 수 없는 것이다. 또한 하산하는 방향으로도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마치 황천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던 라일라(Laila, 6200m)와 트리니티(Trinity, 6700m)피크, K6, K7 등의 봉우리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내려가야겠다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다.




                                                        < 곤도고로 패스(5650m)의 정상부 >


하산이 시작되었다.


하산길인 북동면은 낙석의 위험이 매우 높다. 그 이유는 곤도고로 패스의 이름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곤도고로의 곤도(Gondo)는 ‘깨어진 조각'이며 고로(Goro)는 '돌'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잔돌로 이루어진 북동면은 낙석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산 길은 올라온 길보다 경사가 더 급한데다 수많은 잔돌위에 눈이 쌓여있어 미끄러우면서 조금만 부주의해도 낙석이 아래쪽으로 떨어지게 된다. 해가 떠서 온도가 올라가서 낙석이 생기는 것은 물론 하산중인 사람들에 의해서도 낙석이 발생하기 쉬우므로 매우 조심해야 한다.


낙석 위험지대는 고도차가 400미터 정도이며 하산하는데만 40분이상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위험지대에 고정로프를 깔아놓아서 하산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 험악한 길은 낙석의 위험 때문에 잠시의 지체도 허용치 않는 익바르의 보챔으로 인해 뛰다시피 내려오게 되었다. 



                                                               < 하산도중 올려다 본 곤도고로 패스 >


익바르는 우리와 함께 하지만 포터들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낙석의 위험이 없는 곳에서 잠시 쉬어간다.







그리고 산과 구름과 빙하에 휩싸인 엄청난 계곡을 보았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져다가 여기에압축해 놓은 것 같다. 스케일이 다르다.

원초적 무질서의 카오스 같은 세계. 여기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 곤도고로 패스 너머의 세상- photo by yosanee >


산과 산 사이에서 빙하가 생성되고 흘러 내려가는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빙하는 제각각의 띠모양으로 갈라져서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빙하를 향해 뛰어들 듯 사라져 가더니 빙하 위에 몇 개의 점이 되어 흘러갔다.

출발한지 6시간 만에 와인(Vigne) 빙하로부터 곤도고로(Gondogoro) 빙하로 내려섰다.

이제 마냥 걷는 것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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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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