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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10.04 귀때기청봉 - 풍경의 흔적 2

I. 꿈

휘리릭 휘리릭~ 새소리가 들렸다. 귀때기를 때리는 낯선 새소리였다. 괭이갈매기 소리일 것이다. 아니 큰새가 파닥이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조금 지나 꺼억 꺼억 소리도 들렸다. 눈을 떠보니 바다였다. 이 낯선 소리는 꿈이었나 보다. 먼 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아바나행 어선이었다. 시끄럽던 소리는 새소리가 아니었다. 스크류가 물을 헤치는 소리였다. 미역줄기와 해파리 떼가 몰려들었다. 멀리서 고래울음소리도 들렸다. 고래울음소리는 스크류 소리와 합창을 이루어 뱃노래를 연상시켰다. 등대 밑으로 주홍색 파도가 밀려오고 멀리 해녀들이 올레길을 돌고 있었다. 올레길은 너덜 투성이의 길이라 구멍에 빠지면 올라오기가 쉽지 않았다. 너덜의 큰 구멍 속으로 달빛이 보였다. 다시 새소리가 들렸다. 아브락사스를 향해 가는 새가 보이더니 곧 사라졌다.

모두 꿈이었다.

바람개비 소리였다.


photo by Profolio


II. 귀때기청봉

사방은 적막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한기가 몰려들었다.

침낭에서 몸을 일으켜 교교한 달 빛 아래로 드러난 검은 능선을 바라보았다.

귀청 꼭대기에선 어디를 보아도 걸림이 없었다. 망망대해의 검은 그림자 위로 몇몇 섬들이 보였다.

밤이 되면서 수많은 풍경들은 밝게 빛나는 몇몇 흰 빛으로 수축되었다. 길과 길 위의 흔적들은 그 빛을 싸고 돌았고, 길 위의 생명들은 등대에 의지하는 배처럼 그 불빛으로 몰려들었다.

옆에 비박하는 친구들은 코골이에 열중하였고, 교교한 달빛이 적막함을 더해주었다. 주변 이쪽 저쪽에 패대기쳐진듯 누워있지만 산중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달빛이 오죽 처연했으면 이 세계가 망망대해로 보였을까.

망망대해 한 가운데서 혼자 배를 모는 뱃사공의 심정이 이리 적막할 것인가.

다시 축축한 침낭 속으로 들어갔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동여맨 침낭틈으로 처연한 달빛이 다시 흘러들었는데 침낭 속으로 머리를 파묻는 것 외에는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었다.


이 설악이 언제적 설악이더냐. 설악이 기억너머로 나타났다.

산은 희미하게 예전 기억들의 윤곽을 그려내고 표면에 착색을 한다. 그리고 능선을 넘어 구름이 몰려오듯 과거를 불현듯 불러낸다. 공간여행과 풍경이 시간여행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저러하게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졌던 한편의 풍경 속에서 의미가 되어 돌아온다. 응축되어있던 흔적의 주름들이 수천의 기억으로 해체되고, 각자 서로 흩어져서 설악에 뿌려졌다. 그래서 설악의 풍경은 내 거친 기억의 천으로 뒤덮여 이곳저곳에 산재한다.



III. 설악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처음으로 설악산을 찾았다. 생애 첫 산행이기도 했다. 3박 4일간의 야영과 강행군으로 인해 거의 탈진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 날 소청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서는 가파른 길에서, 멀리 까마득 아래의 산장 주변에 쳐진 형형색색의 텐트를 보았다. 그건 산중에 무수히 피어 난 꽃이었다. 저무는 해와 고사목지대 속에서, 멀리 바다를 보았다. 그건 희망이었다.

그 이후 산은 나에게 희망이자 안식처가 되었다. 특히 설악은...

오랫동안 설악은 내 삶의 모티브였다.

10여년 전 야영금지 후 설악에서의 자유로운 방랑을 끊은 후에도 설악은 늘 가슴 한구석에 있었다.


중청봉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서쪽으로 향해가는 능선길로 접어들다 긴 너덜지대를 지나면 하늘 높이 솟은 귀때기청봉(1577m)이 나타난다. 대청봉과 키재기를 하다가 귀싸대기를 맞아서 귀때기청봉이라고 했다는 전설도 있지만, 이 봉우리는 설악을 서북으로 나누는 서북주릉의 최고봉이다.



긴 너덜지대를 지나 귀청에 오르니 이미 선점자가 있다. 햄 매니아가 추석 연휴 햄(HAM) 통신을 위해올라와 간이 햄 중계소와휴대용 풍력발전기도 설치해 놓았다.멈춰있는 바람개비를 보며 제대로 작동할런지 의심이 갔지만 바람개비는 주로 심야에 활동하였다.


귀청 꼭대기에서 설악은 진정한 풍경이 되었다. 사방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이곳에선 지도의 점이 풍경의 점으로 일치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멀리 빛나는 풍경은 설악의 풍경이기 전에 내 삶의 흔적이다. 그 속에서 삶의 환희와 질곡을 마주한다.

나에게 있어 설악은 작은 역사이기도 하다.

예전의 화려했던, 가열찼던 산행은 마주보는 거대한 공간에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주름진 겹겹의 능선과 계곡엔 모든 것이 녹아있다. 주름진 겹겹의 능선과 계곡에는 나이테 만큼의 추억과 기억이 깃들어 있는 것이다. 매번의 산행은 능선과 개울을 잇고 하나의 길을 만들었다. 그 길 위로 에피소드가 덧붙여져 이미지가 형상화되었다.

귀청 꼭대기에서 멀리 하나의 흔적이 더듬어 질 때 풍경은 음영져서 도드라지고 부풀어오른다. 하나의 사연이 되살아 날 때 풍경은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고 기억의 문을 두드려 안으로 들어온다. 그리하여 가야동 계곡의 짙푸른 물줄기로 거듭 떠오르고, 공룡능선의 추억으로 되살아 난다.


파노라마 처럼 펼쳐진 설악의 풍경은 볼 때 마다 귀때기청봉에 선 하찮은 존재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그리하여 구곡담이, 화채능선이, 용아장성이, 1275봉이, 마등령이, 대청봉이, 외설악의 능선들이 하나씩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빛나고 있다. 아울러 같이 했던 산벗들의 모습이 하나씩 오버랩된다.

이 친구들 역시 풍경이다.

부들부들 떨면서 빗속의 공룡능선을 걷던, 탈진해서 과자 하나를 나누어 먹던, 힘든 러셀을 마다하지 않던, 서로 배낭 무게를 재며 조금이라도 짐을 양보하려 했던 그런 산 친구들이다. 수많은 풍경들은 번갈아 주인공과 배경이 되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해가 지면서 드러나지 않았던 풍경의 존재들이 하나의 점들로 귀청에 떠올랐다. 봉정암이, 오세암이, 소청산장이, 백담사가 하얀 불빛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밤바다가 주홍 달빛으로 물들어 세상을 비춘다.

그 위로 교교한 달빛이 모든 것들의 풍경을 자처하며 떠오른다.

이제 오랜 벗들은 코를 골기전까지 기꺼이 풍경을 낚을 준비가 되어있다.

부들부들 떨면서도 말이다.

풍경은 또 다시 자신을 포함하여 우리 모두를 풍경의 흔적으로 만들어갔다.


杖頭挑日月 脚下太泥深

지팡이로 일월을 따니 발밑에 산이 깊다.



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