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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17 지리산 - 기억 그리고 경험 8


I.


“흘러가지 않은 것 그것을 우리는 기억이라 부른다.”



II.


무언가 의식의 한 귀퉁이에서 흘러가지 않고 남아있음을 알게 될 때,

그리고 그것이 흘러가지 않았음을 다른 이가 상기시켜줄 때, 삶은 버라이어티 쇼처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다가온다.

짧았던 2박2일의 길. 길 위의 길과 산 위의 길.

그들이 설계하고, 그들이 꾼 꿈 속에서 나는 흘러가지 않은 기억이 있음을 보았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들이 지리산의 능선에서 홀로그램처럼 3D로 재현될 때 내가 그런 기억들을

소중히 여겼던 적이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기억 속의 기억에선 기쁨도 슬픔도 없다. 그냥 빛바랜 사진처럼 무채색이다.

기억이 무채색을 채색하여 그때마다 의미를 부여한다.

그리고 기억에는 과거에도 물어왔던 무수한 물음이 숨어있다.

또 다시 세석에서 지쳐 찌그러진 그들에게 물었다.

또 여기 왜 왔냐고, 다시 오겠냐고? 그들은 말했다. 자신들도 왜 왔는지 모른다고...

그들처럼 나도 모른다.



III.


쾌락이 적극적 경험인 반면 고통은 수동적 경험이다.

쾌락에 대한 추구가 적극적이고 반복적 경험인 반면 고통의 체험은 피동적이고 부수적이다.

게다가 감각적 쾌락은 자극적이다.

그러나 쾌락이 정점에 이르렀다 소멸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무상함을 느낀다.

또 다시 쾌락을 잡기위해 매번 같은 짓을 하고 같은 꿈을 꾸지만, 꿈처럼 모든 쾌락은 잡으려 할수록 사라진다.


등산은 감각적 쾌락이 아닌 또 다른 형태의 경험이다.

등산이 주는 매력은 쾌락에만 있지 않다. 좋은 경치와 시원한 공기는 등산의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등산은 부정을 부정하는 경험이다. 부정의 끝을 경험하는 것이다.

따라서 쾌락의 추구 대신 고통과 그 소멸이 중심 주제가 된다.

불편함과 고통이 나타났다 사라져갈 때 다른 형태의 경험이 다가온다.

온몸에 끈적거리며 흘러내리는 땀, 갈증, 점점 더 아파오는 발목과 무릎의 통증, 어깨의 욱신거림,

숨을 쉴 때마다 느껴지는 가슴의 답답함. 점점 무거워 지는 숙명같은 배낭의 무게.

가야할 먼 길에 대한 부담감. 이 길을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은 고단함,

오늘은 어디서 잘 것인가. 

북적거림을 피해서 도망쳐온 곳에서 느끼는 또 다른 북적거림.

고통과 불편함이 매순간 밀물처럼 몰려온다....


비는 내리고 온몸은 금방 젖어온다. 쉬고 싶지만서도 파고드는추위에 마냥 걸어야 한다.

신발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마지막 욕심마저 사라진다.

자유가 찾아왔다. 이제 비와 나는 하나다. 질척거리며 괴롭히던 빗속의 험한 길은 이제까지와는 다른 길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었던 그 끝에서 일상은 전환된다. 그리고 새롭게 경험된다.



IV.


일상이 전환되는 그 끝에는 어떤 여지가 있다.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는 듯한 쳇바퀴 같은 모호함일 것이다.

게다가 경험은 금방 다른 경험으로 대체된다.

그리하여

경험만 남기고 시간은 유수처럼 흘러간다.

경험이 시간을 빼앗아 기억 너머에서 그것을 찾는 우리를 비웃는 듯하다.

다시 경험을 찾아 나선다.

우리는 늘 길 위에 서있고 길은 늘 우리 앞에 펼쳐져 있다.

지금 보이는 것도 길이고 지난 밤 꿈꾸고, 깨어나 걸었던 곳도 여느 길이였다.

지난 길들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지만 우리는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래서 길은 늘 새로운 길이다.

우리의 삶이 끝없이 동일한 것을 반복을 한다 해도 늘 새로운 경험인 것처럼...



< 세석가는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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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들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