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조사 현웅스님의 법문.
스님의 글을 아주 좋아한다. 스님의 책 "묻지않는 질문"부터 해서...
특히 스님의 불성관佛性觀은 화두처럼 가슴에 품고다닌다.
가끔번뇌와 집착으로 마음이 어지러울 때 읽어보곤 한다. 마치 등대의 등불에 의지하듯이 찬찬히 살펴본다.
사실 집착은 우리 삶 그자체이다. 그래서 삶이 고통이라고 하나보다.
한 육개월전 쯤인가보다.
당시 나름대로 맴돌던지독한 집착으로부터 헤어나보려고 애쓴적이 있다. 도망치려해도 쉽지 않았다.
마치 운명처럼 끈적끈적 다가와 정말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달 동안 현웅스님의 아래 글을 이곳 저곳에 붙여놓고 그 집요함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마음을 살펴보게 되면 마음의 실체를 대강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과 한시간도 좋고 하루도 좋고 일주일도 좋습니다.
아니 한달도 좋습니다.
이 마음을 알자 마자 이런 시간동안 같이 살아야 겠다고 마음 먹어 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실체는 더 또렷해지며 우리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자성에 의해 그 실체라고 보고 믿었던 것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진짜 지나고 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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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모든 고통은 집착에서 생긴다고 가르칩니다.
그 집착이 멸하므로써 고통이 저절로 멸해진다라고 또 가르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고통을 만나면 그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두리번 거립니다.
마음은 여러 갈래로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갈피를 못잡고 안개속에 있게됩니다.
이런 상태 있을 때에는 어떤 가르침을 가져다가 자신의 문제를 풀어 보려고 하지만 산만한 마음만 더 할 뿐 도움이
안되는 것을 우리는 많이 경험 합니다.
마침내는 모든것을 잊어 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의 사안에 따라 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그 문제 앞에 서성거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위 말하는 번뇌입니다.
사람이 살아 가다가 이런 경우를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 산만스럽고 번뇌스러운 마음을 붙들어매어 내 마음 가장 가까이 가지고 와야 합니다.
피하려고 한다거나 어떤 테크닉을 가겨와 해결하려 하지 말고 자신있고 용감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변명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상대에게 불평을 전가시켜 해결하려는 마음은 더 더욱 삼가 해야 합니다.
사실을 자세히 살펴 보면 상대는 나에게 없습니다.
오직 내가 만들어 놓은 상대만 있을 뿐입니다.
내가 만들어놓은 상대는 내마음 안에 있는 마음 입니다. 이 내 마음이 없으면 상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럴때 일 수록 내 마음을 살펴야 합니다.
마음을 살펴보게 되면 마음의 실체를 대강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과 한시간도 좋고 하루도 좋고 일주일도 좋습니다.
아니 한달도 좋습니다.
이 마음을 알자 마자 이런 시간동안 같이 살아야 겠다고 마음 먹어 봅니다.
그렇게 되면 마음의 실체는 더 또렷해지며 우리 스스로 갖추어져 있는 자성에 의해 그 실체라고 보고 믿었던 것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면 마음의 실체라는 것이 본래 없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본래 없으면서 만가지 실체를 통하여 작용을 하게되니 알 수 없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 알수없는 것이 소위 말해지고 있는 "이뭣고 "입니다.
이뭣고이지만 이 뭣고 하는 생각의 실체가 떨어져 나가버린 상태에서의 이뭣고 이기 때문에 어떤 다른 사량심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럴때 이뭣고는 이뭣고를 할 수록 나라는것은 떨어저 나가 버리며 오직 알 수없는 이뭣고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흔히들 이뭣고를 할 때 내 생각을 깔아 놓고 이뭣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름니다.
이 바른 이뭣고의 길에 들어 서게 되면 모든 의식의 잡된 것들은 저절로 떨어져 나가 버리며 몸과 마음을 놓게 됩니다.
이럴때는 오직 이뭣고만 있을 뿐 아무 사념이라고는 없습니다.
앞을 봐도 이뭣고 뒤를 봐도 이 뭣고 앉고 서고 운전하고에 상관없이 이 뭣고만 잇습니다.
여기에는 고도 없으며 삶이라고 붙들고 있는 어떤 특별한것도 없습니다.
오직 눈앞에 알 수 없는 생각이 아닌 한생각만 있습니다.
어떤 깨달음을 기다리는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과거니 현재니 미래니 얻으니 잃으니 그런 마음도 없습니다. 그냥 몸과
마음은 가벼우면서 부드럽고 이 삶 속에 묘의 눈만 있을 뿐입니다.
이 묘의 눈은 형상이 없는 것이어서 얻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잃을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이러 할때 있는 눈을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만나되 분별을 하고 분별은 하되 분별에 영향을 받지 않으니 고와 집도 없으며 고집멸도도 없습니다. 붓다께서
설하신 노사진도 없습니다.
불은 시방세계에 있습니다.
처처가 불이며 화엄이 펼쳐집니다. 삶속에는 불보살의 나툼이 있을 뿐 다른 중생 같은 것은 없으며 고를 받는 중생을
보메 자비심만 있습니다.
여기서 보살의 원이 자라 납니다.
이런 공부의 근본은 처음이 모두가 고의 근본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고는 곧 바로 깨달음의 시작입니다.그러므로 우리들은 고를 피하려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러 가까이
해야 할 대상입니다.
고 있는곳에 불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고를 인정 하지 않으려고 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고 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에게 진실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문제를 원망이나 불평으로 확산 시키지 말고 받아들여
감싸 안고 사는 것부터 배워야 된다고 봅니다.
고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더 설명을 요하면 시궁창에 진흙이 없으면 연꽃이 피우지 않는 것과 같읍니다.
깨달음을 구하기 전에 고를 가까히 하고 같이 사는 것부터 배워가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나를 용서 하듯이 남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용서함으로 이사회도 같이 넉넉해는 삶이 되도록 공부해 봅시다.
그에 대한 단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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